2012. 10. 18. 14:30ㆍ♧- 사는 이야기 -♧/역사와 예술
발해의 진실 - 무덤은 말한다
▲ 중국 당국이 지난 2004-2005년 지린성(吉林省) 허룽시(和龍市) 룽하이촌(龍海村)에 있는 발해시대 고분군 유적인 룽터우산(龍頭山) 고분군에 대한 발굴성과를 최근 공개했다. 그 결과 이곳에서는 발해 3대 문왕의 부인인 효의황후(孝懿皇后) 묘지와 9대 간왕(簡王)의 부인인 순목황후(順穆皇后) 묘지가 발굴됐다. 사진은 발굴고분 중 M13ㆍM14 고분. / 연합뉴스
'동북공정 논리' 정면 반박하는 유물, 중(中) 지린성에서 출토
황후 호칭·금제 관식 등 고구려의 정통 계승 입증
중국 동북지방의 발해 왕실 무덤에서 고구려 조우관(鳥羽冠·새 깃털을 꽂은 관)을 꼭 빼닮은 관(冠) 장식과 묻힌 사람을 '황후(皇后)'라고 밝힌 비문이 확인됐다.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당(唐)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해온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정면반박하는 유물들이다. 게다가 이 유물을 발굴하고 확인한 것이 중국 정부 연구소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문물고고연구소와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문물관리위원회 판공실은 지린성 허룽시(和龍市) 룽터우산(龍頭山) 일대 발해시대 고분 14기의 발굴 결과를 최근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고고(考古·2009년 제6기)'에 발표했다. 8세기 후반~9세기 전반 조성된 이 고분군은 1980년대에 발해 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貞孝公主) 무덤이 발굴됐던 곳이다. 중국 정부는 발해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난 2004~2005년 이 일대를 발굴했으며, 그 결과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중국 지린성 허룽시 룽터우산 일대 발해시대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제 관식(왼쪽 사진). 새의 날개 이미지가 세 가닥으로 갈라진 식물 이파리처럼 표현돼 고구려 조우관(鳥羽冠)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평가된다. 오른쪽 사진은 이 금제 관식이 나온 M13·M14 무덤으로 부부 합장묘로 추정된다./송기호 교수 제공
발굴 결과를 정리한 '발해 왕실묘장 발굴 간보'에 따르면, 룽터우산 발해 고분군 중 대형 돌방무덤(석실묘)인 M12와 M3호 무덤에서 각각 발해 3대 문왕의 부인인 효의황후(孝懿皇后)와 9대 간왕(簡王)의 부인인 순목황후(順穆皇后)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출토됐다. 순목황후 묘지는 너비 34.5㎝, 높이 55㎝, 두께 13㎝로, 세로 9행에 걸쳐 총 14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고, 비문에는 "발해국 순목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씨(泰氏)다"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또 부부 합장묘로 추정되는 M13·M14 무덤에서는 고구려 조우관의 전통을 잇는 금제 관식과 팔찌·비녀 등이 출토됐다.
최근 이 보고서를 확인한 송기호 서울대 교수(발해사 전공)는 25일 "묘지에 황후라는 호칭을 썼다는 것은 발해가 지방정권이 아니라 황제국을 지향했다는 증거이고, 무덤 양식이나 부장품을 보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새의 날개 이미지를 세 가닥으로 갈라진 식물 이파리처럼 표현한 금제 관식은 고구려 조우관의 전통이 발해까지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물 자료"라고 평가했다.
[기사입력: 2009/08/26 최종편집: ⓒ 메스타임즈]
고조선,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영토
배달겨레 9200년 국통
환국에서 배달로
고조선의 삼한관경(三韓管境)
고조선이래
삼국시대
발해시황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기 전에 영주에서 억압받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모산까지
이동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예상 이동경로.
대조영은 거란의 대당전쟁을 기회삼아 고구려 멸망후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장장 천리가 넘는 대 행군을 감행하였고 특히, 추격하는 당군을 천문령에서 격파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다.
[엽기 혹,진실 (그대 기다리는 동안 님) 중에서]
발해의 역사와 문화
발해는 건국에서 멸망(698~926)에 이르기까지 228년간 15대를 이은 중앙집권적 왕조로서 독자적인 국가운영체제를 갖춘 독립국가였다. 1대인 고왕 대조영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뒤, 2대 무왕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그의 뒤를 이은 문왕은 발해 전체 역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7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리면서 내치에 힘을 모아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후 4대부터 9대까지 25년 동안 6명의 왕이 교체되는 일시적 내분기를 겪고나서는 10대 선왕에 이르러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정복활동을 마무리하여 9세기 전반에 최대의 판도를 확보하여 다시 중흥을 맞이하였다.
발해의 건국과 영토확장 및 중흥의 주요 역군은 건국초기부터 고구려의 상무기풍을 물러받은 40만 강군이다. 이것은 8세기 전반 49만을 헤아리는 당나라의 군사력과 막상막하였다.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 ‘풍속에 말타기와 사냥을 즐긴다’라는 사적의 기록은 무예를 숭상하는 발해인들의 용감한 기상을 전해준다.
발해 건국 초기의 인구는 78만명에 불과했으나 고구려 유민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거란족과 말갈(=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게 됨에 따라 전성기 시절 인구는 33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위의 기록을 통해 발해의 인구와 군사력이 330여만명-40만 강군이라면, 멸망시의 고구려는 발해의 인구와 군사력의 몇 배나 되는 대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인구를 최소한 발해의 2배로 잡는다 하더라도 660여만명이라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고구려 전성기에는 1000여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신당서>가 전하는 바와 같이 발해는 자신들의 연호를 줄곧 사용했으며, 시호도 스스로 만들어 썼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에는 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부를 정도로 발해는 당나라와 동격의 황제국이었다.
중국 지린성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고, 황제국을 지향했음을 알려주는 발해 황후의 무덤이 발굴됐다. 최근 중국사회과학원이 발간한 ‘고고(考古)’(2009년 제6기)에 실린 ‘발해왕실묘장 발굴 간보’에 따르면 2004~2005년 지린성 허룽시 룽하이 마을 룽터우산 고분군에 있는 발해왕실무덤에서 고구려 조우관(鳥羽冠)의 전통을 계승한 금제관식이 발굴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발해국 3대 문왕(재위 737~793년)의 황후 효의왕후와 9대 간왕(재위 817~818년)의 황후 순목황후의 묘지(墓誌)가 출토됐다. 그런데 순목황후의 묘지에는 “발해국 순목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泰)씨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나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발해를 ‘해동성국’, 즉 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강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융성은 14대까지 이어오다가 15대에 와서 거란의 내침으로 마감되고 만다. 그러나 요동반도에 끌려간 발해유민들은 ‘후발해국’이니 ‘대발해국’이니 하는 이름의 후계국들을 세워 부흥운동을 근 2백년 동안이나 벌인다.
신라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던 일본은 발해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 720년에 자진해 사신을 파견한다. 발해는 아랑곳하지 않다가 당과 흑수말갈, 신라간의 밀착이 엿보이자 군사적 동맹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7년 후에 무관 출신의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는다. 그 후 양국관계는 신속하게 발전하는데, 전기에는 주로 군사외교이나, 후기에 와서는 경제문화교류가 주류를 이루면서 일본에 대한 발해의 문화적 영향이 커진다.
<속일본기>를 비롯한 일본 사적의 기록과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사 목간’이나 ‘견(遣)고려사 목간’ 등 유물이 증언하다시피 두 나라간에는 11회의 사신교환이 있었으며, 문물교류도 상당히 빈번하였다. 871년 일본에 간 발해사신들이 첫날 관무역에서 얻은 이익만도 일본화폐로 40만 냥,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6억 6천만엔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발해사신들은 일본 문인들과 작시를 주고받는데, 오늘까지 남아있는 발해 한시 10수 중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같은 9수는 이들 발해사신들이 지은 것이다. 발해악이 일본 궁중음악의 하나로 된 것도 이무렵이다.
발해문화는 당문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를 받아들어 융화시킨 독특한 복합문화다. 무덤양식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돌무지 무덤이 위주이지만 당의 벽돌무덤이나 말갈의 흙무덤도 받아들였다. 당삼채를 본받아 삼채도기를 구워냈으며, 금 알갱이를 촘촘히 박는 서역의 누금기법으로 정교한 금속장식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발해 고유의 문화상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몇 사람의 뒤를 따라 여러 명이 빙빙 돌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답추(踏鎚) 춤이나, 연꽃잎 무늬에서 3국은 8개 잎을 기본으로 하는데 비해 6개 잎으로 꾸미는 기법을 쓴 것이 그런 사례다. 또 여러 명을 합장하고 그 무덤 위에 건물을 짓는 건축술 등도 발해만의 문화현상이다.
발해의 유물 중에는 몇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다. 연해주의 옛 발해성인 노브고르데예프성 밖 취락지에서 은화 한 점이 발견되었는데, 앞면에 왕관과 함께 ‘부하라의 군주 짜르’란 소그드 문자가 새겨져있는 점으로 미루어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은화임이 확실하다. 교역수단인 이 은화는 북방 실크로드의 초원로와 연결되는 거란도(일명 ‘담비의 길’)를 따라 발해까지 유입된 것으로서 수만리 떨어진 두 지역간에 교역이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또 한가지 신기한 것은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간의 융합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의 발견이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동경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발해의 서변에 자리한 우순(撫順) 지역에서도 수백점의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신라의 경주에서도 석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와 약 250년 동안 성행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가 9세기 전반 탄압을 받고 축출될 때, 발해 땅에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경교는 불교와 습합하는 방법으로 전파를 시도하였으니, 그 맥락에서 보면 발해에서 두 종교간의 융합관계는 이해가 될 것이다. 배타가 아닌 어울림의 문화를 꽃피운 발해인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10세기초 발해는 귀족 권력투쟁과 국정 불안으로 사회모순이 커지면서 925년 거란의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의 침략을 초래한다.
1년만에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고 애왕(哀王)이 투항함으로써 발해는 229년만에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고구려계인 고영창(高永昌) 등에 의한 발해 부흥운동이 세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보기는 그러나 곧바로 발해국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를 인황왕(仁皇王)으로 앉히며 발해국 계승을 선언했다.
당시 발해 유민 300여만명중 190만명은 동단국에서 거란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 110만명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중 10만여명은 고려로 넘어갔고 60만명은 여진으로 도피했으며 1만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왕족 2명, 귀족 25명을 포함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자 고려는 이들을 후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본래 우리의 친척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동단국은 이후 동거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도 발해의 행정체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사실상 동단국은 발해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 동북아역사재단 ‘발해의 역사와 문화’ 펴내
발해사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발해의 역사와 문화’는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諡號)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皇上)으로 칭하는 ‘황제국’이었음을 밝혔다. 한마디로, 발해가 자주적 왕조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위원 등 22명의 관련 분야 전문가를 비롯, 중국·일본·러시아의 학자까지 참여한 책은 발해의 각종 제도 및 외교관계, 사회,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의 주요 논지를 소개한다.
◆ 발해는 자주적 왕조국가였다 =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했음을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新)당서’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신당서는 이같은 발해의 움직임에 대해 ‘사사로이’ 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한편 발해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는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일본에서 스스로를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는 ‘고려국’이었음을 자칭했다.
◆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했다 = 발해가 국제 교류에서 고구려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록에 의하면 서기 739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夢) 일행이 일본에 당도,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했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 배석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는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의 언어가 서로 소통 가능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발해 사신이 신라어와 통하는 고구려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등주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150t의 카라크선(carrack 船)이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미래영웅님 글 중에서]
발해의 문화와 풍습
1) 포(布)로 유명한 발해의 현주는 중경현덕부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포는 삼〔麻〕을 원료로 한 직물일 것이다.
2) 발해의 벼 생산지로 유명한 노성은 중경현덕부에 소속되었던 곳으로,
해란강 유역의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 지역은 만주 동북부에서는 가장 비옥한 곳으로 알려진 지역이다.
3) 철 생산지로 되어 있는 위성(位城)은 중경현덕부에 속한 철주(鐵州)의 수현이다.
‘철주’란 이름도 철의 생산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4) 당나라와 일본에 보낸 물품으로 각종 짐승가죽, 인삼이나 꿀·사향과 같은 약재, 구리와 같은
광산물이 들어 있어서 수렵업·임산업 등의 면모나 외국과의 무역 양상을 추측할 수 있다.
5) 발해는 이처럼 만주 동북의 산악지대를 개척하면서, 그 천연자원의 활용에 힘을 기울였다.
발해의 문화재
1) 성터와 건물터
성터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 조사는 1933년과 그 이듬 해에 일본의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가 동경성(東京城 : 지금의 상경성)을 발굴한 것이 최초이다. 그 뒤 많은 성터들이 확인되어 100개 정도가 발해시대의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들은 그 중심지였던 만주의 동부 지역에서뿐 아니라 북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도 분포해 있다. 발해 성터에는 평지성, 산성이 있는가 하면, 중심되는 성을 방어하기 위한 보루, 차단성도 있다.
성을 쌓는 재료로 볼 때에 토성(土城), 석성(石城), 토석 혼축성(土石混築城)이 있다. 평지성의 경우는 토성이 대다수이다. 그리고 산성의 경우는 석성이 대다수이다. 평면상으로는 장방형·방형·부정형 등이 있다.
발해는 전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 및 100여 개의 현(縣)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그리고 그 소재지에는 성을 쌓아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주요한 성들을 도성(都城)·부성(府城)·주성(州城)·현성(縣城)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성으로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과 영승(永勝)유적, 상경성(上京城), 서고성(西古城), 팔련성(八連城) 등이 있다. 성산자산성과 영승유적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돈화시(敦化市)에 있는 초기 도읍지이다.
대조영이 동모산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했다고 하는데, 성산자산성이 이 곳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평지로 내려와 중심지로 삼았던 곳으로 종래에는 오동성(敖東城)이 지목되었다. 그러다가 근년에는 영승(永勝)유적이 유력시되고 있다.
상경성은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에 있는데, 8세기 중반에 문왕(文王)이 이 곳에 도읍을 옮긴 뒤로 가장 오랫동안 수도가 되었다.
서고성은 길림성 화룡현(和龍縣)에 있는데, 8세기 전반기에 일시적으로 도읍을 삼았던 곳이다. 그리고 팔련성은 길림성 훈춘시(琿春市)에 있는데, 8세기 후반기에 10여 년 간 도읍을 삼았던 곳이다.
부성으로는 북청토성(北靑土城)·소밀성(蘇密城)·대성자고성(大城子古城)·유즈노 우수리스크(Iuzhno Ussuriisk) 성터 등이 있다. 북청토성은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에 있으며, 청해토성이라고도 불린다. 이 곳은 5경의 하나인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자리로 비정된다.
소밀성은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에 있는데, 장령부(長嶺府)의 소재지로 여겨진다. 솔빈부(率賓府)의 소재지로는 대성자고성 또는 유즈노 우수리스크 성터가 지목되고 있다. 주성으로는 크라스키노(Kraskino)성·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살기성(薩其城)·남성자고성(南城子古城)·남호두고성(南湖頭古城) 등이 거론되고 있다.
크라스키노 성은 연해주 하산(Khasan) 구역에 있다. 이 곳은 동경(東京)에 속했던 염주(鹽州)의 소재지였다. 성 부근에 흐르는 강이 얼마 전까지 얀치헤(Ianchikhe), 즉 염주하(鹽州河)로 불렸던 데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남성자고성은 독주주(獨奏州)의 하나인 속주(涑州)의 소재지로 추정된다. 그리고 남호두고성은 상경(上京)에 속했던 호주(湖州)의 소재지로 거론되고 있다. 현성으로는 토성자고성(土城子古城)이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발해 성터에 관한 연구로서 고구려 및 당나라 성과 비교해 발해 성의 변화 과정을 언급한 것이 주목된다. 발해 성은 성산자산성과 영승유적처럼 초기에는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방어체계를 보여 준다.
이것은 집안(集安)의 환도산성(丸都山城)과 국내성(國內城)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다가 8세기 중반 이후 당나라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평지성 중심의 방어체계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예는 상경성을 비롯해 서고성, 팔련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전체 시기를 놓고 볼 때에 발해의 성은 건국 초기에 고구려 식을 계승했다가 당나라 식으로 전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 내외에 건축되었던 건물들은 그다지 많이 발굴되지 않았다. 발해시대의 건물로서 궁전이나 관청 자리·성문·정원·교량·우물 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절과 탑 자리도 많이 확인되었으며 평민 주거지도 조사되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무덤 위에서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건물 성격에 관해 논란이 있는 24개석 주춧돌 유적도 10여 곳에서 발견되었다. 궁전과 관청 자리는 상경성에서 조사된 것이 대표적이다.
궁전은 모두 7개인데, 이 중에서 5개의 궁전은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건물들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관청 자리는 거의 발굴되지 않아서 면모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 밖에 궁성의 동쪽 구역에는 속칭 어화원(御花園)이라 불리는 금원지(禁苑址)가 있었다. 이 곳에는 인공으로 만든 못과 산이 있고 정자 터도 확인되었다.
상경성 부근의 모단강에는 발해시대에 사용되었던 오공교(五孔橋), 칠공교(七孔橋) 등과 같은 교량 유적이 남아 있다. 한편, 성에서 벗어난 지역에서도 주거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평민 주택으로 보이는 반지하식 건물지들이 동녕현(東寧縣) 단결(團結)유적에서 발굴되었다.
또한, 연해주 일대에서도 성 안팎에서 화덕자리나 온돌 장치가 딸린 반지하식 또는 지상식 주거지들이 발굴되었다. 건물 축조에 사용되었던 기와와 벽돌을 굽던 요지(窯址)도 상경성 부근의 행산(杏山)과 크라스키노성터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발해 건물의 외형은 1987년에 연해주 하산 구역에서 발견된 불판(佛板)에 불상이 안치된 목조 건물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이 방면의 연구에 도움을 준다.
2) 무덤
고분들은 주로 구국(舊國)의 소재지였던 길림성(吉林省) 돈화시(敦化市)와,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소재지로서 가장 오랫동안 수도였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 상경성(上京城) 등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의 소재지였던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서고성(西古城),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의 소재지였던 길림성 훈춘시(琿春市) 팔련성(八連城) 주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또한, 서경(西京)의 관내였던 길림성 통화(通化)지구, 남경(南京)의 관내였던 함경남북도 지역을 비롯해, 변방에 해당하는 길림시(吉林市) 지역, 수분하(綏芬河) 유역,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남부 지역 등에서도 약간의 고분이 발견되었다.
대체로, 중국에서는 50여 지점에서 2천 기 이상이 발견되었고, 이 중에서 수백 기가 발굴되었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 함경남북도 일대에서 발해 고분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수천 기의 고분을 확인하고, 수백 기를 발굴했다고 한다.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2∼3개 지역에서 10기 미만의 극히 적은 숫자의 고분만이 발견되어 성터·주거지·절터 유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조사가 부진하다.
주요한 고분군으로는 다음과 같다. 돈화시에 있는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는 모두 80여 기의 무덤이 있으며, 이 중에서 32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특히 1949년에 정혜공주(貞惠公主)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여기에 발해 초기의 왕실과 귀족들이 묻혀 있음이 확인되었다.
서고성에 가까운 화룡현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서도 1980년에 정효공주(貞孝公主)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고분군에 있는 10여 기의 무덤이 역시 왕실, 귀족들의 것임이 밝혀졌다.
발해 고분에는 흙무덤, 돌무덤, 벽돌무덤 등이 있다. 흙무덤은 건국 이전부터 유행했던 양식으로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돌무덤은 다시 석실묘(石室墓), 석곽묘(石槨墓), 석관묘(石棺墓)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석실봉토묘(石室封土墓)가 발해 고분의 중심을 이룬다.
돌을 이용해 무덤을 쌓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적인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석실봉토묘는 고구려 후기의 양식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정혜공주 무덤이다.
벽돌무덤은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발해 중기 이후에 왕실에서 일부 받아들여졌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다. 대표적인 것은 정효공주 무덤, 마적달(馬滴達) 무덤이다. 특히 정효공주 무덤은 벽을 벽돌로 쌓으면서 천장은 돌로 평행고임을 해 당나라 양식과 고구려 양식이 결합된 양상을 보여 준다.
이 밖에 상경 부근의 삼령둔(三靈屯)에서 발견된 고분들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축조하였다. 매장 방식으로 단인장·2인합장·다인합장이 모두 보인다. 2인합장은 부부합장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인합장은 발해 매장 습속의 특색을 이루는데, 주인공과 배장자(陪葬者)가 뚜렷하게 구별되는 예도 있다. 배장자는 적게는 1인에서 많게는 14인에 이른다. 이러한 배장자에는 주인공과 혈연 관계에 있던 가족뿐만 아니라, 그에 딸린 노비나 부곡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의 배치 상태를 보면 1차장과 2차장이 모두 존재하며, 하나의 무덤에서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2차장 인골은 대체로 추가장에 의한 것이다.
1차장의 경우에는 목관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목관 없이 직접 묻은 예도 보인다. 발해 초기에는 육정산 고분군에서처럼 화장(火葬)도 유행하였다. 이것은 시신을 관에 넣은 채 무덤 안에서 불에 태우는 방식이다. 이러한 풍습은 중기 이후에 점차 사라진다.
이 밖에 육정산 고분군에서는 사람뼈와 함께 동물뼈들도 출토되었다. 동물뼈로는 말, 소, 개의 뼈들이 있는데, 이러한 특이한 습속은 발해 초기에 유행하였다. 한편, 발해에서는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도 있었다.
삼령둔 고분과 하남둔(河南屯) 고분에서는 봉토 위에서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육정산 고분군과 용두산 고분군에서는 봉토에서 기와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불교가 성행하면서 탑으로 변모하였다.
바로 정효공주 무덤과 마적달 무덤은 승려의 무덤이 아닌데도 그 위에 벽돌로 만든 탑이 세워져 있다. 이러한 전통은 중국인들이 말갈의 풍속을 계승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이보다는 고구려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 고분에서 기와가 다수 발견되었고, 장군총(將軍塚) 정상부에 건물 난간의 흔적이 있는 것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꿈과 비전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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