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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과 왜곡된 진실

달빛산책012 2012. 10. 18. 11:00

십자군 전쟁


 

개요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한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1095년 시작되었던 십자군 전쟁은 1456년까지 약361년 동안 계속되었고 십자군(라틴어: croisade)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 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을 함락시켜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군 전쟁이었다.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측에서 보면 십자군 원정은 성전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이나 이슬람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침략전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십자군 전쟁의 시대적 배경과 원인


흔히 중세 시대를 유럽의 암흑기라고 말한다. 중세 시대는 봉건 영주들과 교황의 위세가 하늘 높이 치솟던 시기였다. 11세기 중엽, 유럽은 나름대로 안정되어 있었고 발전하고 있었다. 물론 로마 제국의 멸망과 게르만족의 대 이동, 가톨릭 교회의 분열, 이슬람 문명의 서유럽 진출 등 많은 사건으로 점철되어 서유럽 세계가 위축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점차 확산된 봉건 제도 아래에서 영주들은 군주제를 여전히 인정했다. 비록 영주들의 득세로 지방분권화 현상이 심해지기는 하였지만 군주제는 국가라는 틀을 유지시켰다. 또한, 농경의 발달과 상공업의 성장은 중세의 경제를 안정시키는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당시의 국왕은 단지 자신의 직할 영지를 다스릴 뿐이었으며 그 휘하의 영주들에게 직접적인 힘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모든 지배자들의 꼭대기에 군림한 것은 다름 아닌 로마의 교황이었다.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국교로 승인된 기독교는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며 로마를 멸망시키고 유럽 대륙을 차지한 게르만 족들까지 기독교로 교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따라서 교황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황제 위에 군림한 실질적인 지배자로 떠올랐는데, 그 절대적인 힘의 실례가 바로 1076년의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 사건이다.

십자군 전쟁은 곧 강력한 교황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황인 실베스터 1세 이후, 교황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주장해왔다. 그의 위상은 유럽 대륙의 왕과 황제의 위에 자리했으며 교황은 카노사에서 황제를 굴복시킨 후 세상에 자신의 힘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 무렵 콘스탄티노플, 즉 비잔티움을 수도로 삼고 있는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가 전령을 보내왔다. 당시 이슬람제국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셀주크 투르크족이 소아시아와 중동을 정복했으며 바그다드로 입성해 수니파의 지도자로서 무슬림들을 이끌게 되었다. 그들은 계속 세력을 확장해가다 결국 비잔틴 제국의 군대와 맞부딛쳤으며 황제 로마노프 4세를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비잔틴의 황제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풀려났으나 곧 사망했다. 마침내 셀주크 투르크는 1071년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성지 순례자들의 통행을 위협했다. 따라서 교역의 길이 막히면서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것이 베네치아 등의 상업 국가들과 유럽의 여러 많은 국가들이었다.

 

알렉시우스 1세는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으며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바누스 2세는 이를 아주 중요한 기회로 인식했다. 그러나 셀주크 투르크는 내분을 맞고 있었다. 내부에서의 전쟁이 거듭되는 상황에서 셀주크 투르크는 비잔틴 제국과 화친을 맺었고 알렉시우스 1세는 오히려 지금이 바로 적기라고 판단하여 병력을 파병했다. 교황인우르바누스 2세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한다.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지 순례자들이 겪는 고초와 이교도들의 성지 파괴에 관해 역설했다. 더불어 동방의 부유함까지 흘려 이 전쟁으로 인한 이익까지 강조했다. 성지 탈환의 당위성을 말하는 교황의 연설에 많은 청중들이 흥분했으며 그들은 그 자리에서 십자가의 서약을 했다. 종교적 열정과 함께 사방에서 지원자들이 몰려 들었다. 그러나 교황의 목적은 단순한 성지 탈환이 아니라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분 아래 강력해진 교권의 힘을 전 유럽에 과시하려 한 것이다. 게다가 로마 가톨릭의 힘이 미치지 못하던 동쪽까지 자신의 권위를 확장하려는 야심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미 십자군 전쟁은 순수한 목적으로 행해진 성전이 아니었다. 또한, 교황의 명 아래 소집된 십자군 병사들도 각자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 영주와 여러 지원자들은 동방으로 건너가 그곳의 부와 미녀, 영지를 차지하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당시 동방 무역으로 들어오는 상품들은 이익이 많이 남는 값비싼 물품들이었고 동방 무역이 막히자 당시 상인들은 골머리를 썩혔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의 선언은 모두에게 매력적인 것이었다.

 

십자군의 군사 원정

 

제1차 원정(1096년~1099년)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으로 괴로워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며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면죄된다고 선언하였다. 이 호소에 응한 서유럽의 기사들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를 공격해 학살과 약탈 등을 저지르면서 예루살렘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당시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1099년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그러나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로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몇 개의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다.

 

제2차 원정(1147년~1148년)


중동에서는 십자군 국가 등 기독교도와 군소의 도시 이슬람교도가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슬람측이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여 만회하였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십자군이 다시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권유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콘라드 2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지 못하였고 또한,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다. 겨우 팔레스타인까지 도착했지만 다마스커스 공격에 실패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3차 원정(1189년~1192년)


1187년에 이슬람의 영웅인 살라흐 앗 딘(살라딘)에 의해 90여년 만에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의해 점령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여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강을 건너다 낙마해 익사했다. 그러나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1191년에 악콘을 탈환하였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귀국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살라흐 앗 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성지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제4차 원정(1202년~120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실시되었는데 예루살렘은 아니고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도항비가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수송을 하청받은 베네치아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송료의 부족분을 지불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공략하는 등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그 다음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여 라틴 제국이 건국되었다. 멸망한 동로마제국의 황족들은 제국령 각지에 망명 정권을 수립했다(동로마제국은 57년 후인 1261년에 부활한다).

 

스테판이라는 소년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촉발된 어린이 십자군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유럽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거나 해상사고로 수장되고 말았다.

 

제5차 원정(1218년~1221년)


악콘 왕국(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의 장 드 브리엔느 등이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다 실패하였다. 당시 머나먼 동방에 있는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의 프레스터 존이 대군을 인솔하여 십자군을 도우러 온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그 정체는 훗날 전 유럽을 뒤흔드는 몽골 제국의 군대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제6차 원정(1228년~1229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원정을 재촉하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이행하려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하였다. 122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켰다. 당시 이집트 아유비드 왕조의 술탄 알 카밀은 내란으로 골치를 썩던 상황인지라 프리드리히 2세의 교묘한 외교정책에 휘말려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그레고리오 9세는 교회로부터 파문된 채로 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된 것을 구실삼아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켰지만 황제군에게 격퇴되어 1230년에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풀어주었다. 1239년에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면서 휴전은 유명무실해졌다. 1239년부터 1240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제후 등이 원정에 나섰지만 결과없이귀환하였다.

 

제7차 원정(1248년~1249년)


알 카밀이 죽은 후 1244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고 2000명 남짓한 기독교도들이 학살되었다. 1248년에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원정을 하게 되지만 아유비드 왕조의 살라딘 2세에 패배하고 오히려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제8차 원정(1270년)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재차 출병하여 아프리카의 니스를 목표로 삼았지만 도중에 죽고 만다.

 


십자군 전쟁의 폐해

 

초기의 기독교도가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믿었던 서기 1000년경에 스페인에서의 아라비안인들의 세력이 점차 힘을 잃고 스칸디나비아의 용병을 태운 비잔티움 함대는 아라비아의 해적을 섬멸하였고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요새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아라비아인의 퇴조로 비잔티움은 오히려 곤란에 처하게 된다. 바그다드의 중요성이 엷어짐에 따라 동방에서 유럽으로의 교역은 바그다드를 경유하지않았고 따라서 바그다드와의 교역 통로 중간에 있던 비잔티움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비잔티움의 동쪽에서는 터키인들이 강력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강인한 유목민족 이었던 터키인을 셀주크라는 강력한 일족이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사라센 제국의 시작이다.

 

셀주크 투르크는 바그다드를 제압하고 그리스로부터 아르메니아를 빼앗고 최후에는 소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과의 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1071년 셀주크 투르크는 아르메니아의 마라즈길드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에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또한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7세는 로마 교황에게 구원을 청한다. 당시의 교황은 프랑스 출신 우르바누스2세였으며 1095년 교황은 프랑스로 달려가서 각지의 주교들에게 클레르몽으로 집합하라고 명하고 옥외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성지에서의 기독교도에 대한 셀주크 투르크인의 잔학한 행위를 전하였다. 사실 셀주크 투르크인이 기독교도를 박해하였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셀주크 투르크인이 엄격하게 대한 상대는 자신들 종교의 분파일 뿐이다. 그러나 성지순례가 종전보다 훨씬 위험해진것만은 사실로서 교황이 성지 십자군을 제창하자 수 백명의 귀족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몸과 재산을 신에 대한 봉사에 바치는 것에 동의 하였다.

 

또 한명의 십자군 제창자는 은자 피에르로서 수도사이며 민중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시의 민중들은 고달픈 생활에 찌들려 있었다. 성지순례는 하루에 16시간이나 밭을 가는 생활보다는 월등히 나을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은 따라 나섰다. 당시 무지한 농부들은 자신들과 싸울 상대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다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교도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독일의 라인라트에서는 에미히 백작이라는 인물 주변에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신의 몸에 십자가의 각인이 찍혀 있었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에미히 백작은 국내에서 학살을 시작하여도 괜찮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의 추종자들에게 슈파이어의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남자는 죽음의 고통에 의해서 여자는 능욕으로써 이교도는 기독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들은 보르무스 도시에서 이틀간에 걸쳐 수많은 유대교도들을 학살하였고, 라인강으로 남하하며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헝가리에서는 질서있게 행동한다는 조건으로 왕으로부터 식량 공급을 약속받은 십자군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국내에서 약탈해도 된다는 묵인으로 받아들였는지 헝가리의 어린 사내아이들을 꼬챙이로 꿰어 다니기도 하였다. 이에 헝가리 왕은 자기 나라를 통과하려면 일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여야만 한다고 포고한 후 십자군들이 무장해제한 사실을 확인하자 헝가리 군대를 동원해 십자군들을 덮쳐 몰살시켜 버렸다. 에미히의 십자군은 헝가리 입국을 거부 당하자 헝가리와 맞서 싸웠지만 전멸의 쓰라림을 맞보고 만다.

 

은자 피에로를 따르는 무리들은 1096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헝가리의 어느 도시를 덮쳐 약 4000여명의 주민을 학살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약탈과 강도짓을 일삼자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서둘러 그들을 적지로 내 보낸다. 적지에 밀고 들어간 피에로의 십자군은 말로 다하지 못할 잔학한 행위를 저지르다 셀주크 투르크의 포위 공격을 받고 거의 전멸하고 일부 동로마 황제의 구출에 의해 살아남은 무리들은 무장을 해제당한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십자군의 실질적인 결과였다.

 

이듬해 고드프라 드 부용이라는 영주가 이끄는 무리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셀주크 투르크와 일진일퇴를 반복하다 더위와 갈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슴을 잃었다. 그래도 십자군은 시리아의 들판으로 진격하여 안티오크를 포위공격 하기를 9개월여, 간신히 함락하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도시의 터키인들은 한사람도 남지 않고 학살 되었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으로 행진을 계속하여 7일동안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다.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었다. 유대인들이 교회당으로 도망하면 거기에 불을 질러 전원을 태워 죽였다.
역사가 살로몬 라이나흐는 저서 [오르페우스, 종교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주일 안에 7만 명의 인간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률의 우위성을 증명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최초의 십자군 전쟁에서의 성공이 오히려 유럽을 파멸로 이끈 요인이 된다. 당시 십자군은 이것으로 성지를 일종의 교회 영지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 결과 2세기에 걸쳐 8회의 십자군 원정이 행해진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참담한 패배였다. 최초의 성공은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았다. 1144년 셀주크 투르크가 에데사를 점령하자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제2차 십자군을 파병하였지만 큰 실패로 끝났다. 1174년에는 셀주크 투르크의 살라딘이 기독교도에 대한 성전을 부르짖으며 전쟁을 일으켜 1187년에 예루살렘을 탈취한다. 이것을 탈환하기 위하여 제3차 십자군이 파견되지만 역시 실패한다.

 

전쟁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1212년 소년 십자군의 파병이었다. 크루아라는 마을의 스테판이라는 12세의 양치기 소년이 양을 돌보고 있을 때 예수가 나타나서 건네주었다는 한통의 편지를 프랑스의 필리프왕에게 전하고 성전을 주장하였으나 왕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꺾이지 않고 계속 주장하였다. 자신이 전투에 나가면 바다는 바싹 말라 육지가 되고 신의 가호를 받은 소년들은 사라센 군대를 타도할 것이라고. 그 후 12세 이하의 남녀 어린이 3만명이 방돔에 모여 슬픈눈으로 지켜보는 부모들을 뒤로하고 마르세유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행군 도중 많은 아이들이 갈증으로 죽고, 겨우 바다에 도착한 아이들은 스테판의 말대로 물이 바싹마르기를 기다렸으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 기적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던 아이들을 바다 상인들이 팔레스티나로 데려다 주겠다고 꼬드겨서 사라센 상인을 통하여 알렉산드리아와 바그다드의 노예로 팔아먹는다. 독일에서는 니콜라스라는 소년이 2만여명의 어린아이를 인솔하여 십자군 전쟁에 나섰다가 로마 교황이 간곡하게 타일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얼마되지 않았고 니콜라스라는 소년도 결국 사라져 버렸다.

 

소년 십자군은 제5차 십자군의 도화선이 된다. 셀주크 투르크군의 협상 제의를 무시하고 전쟁을 치렀으나 실패하고 할 수 없이 타협에 응한채 유럽으로 철수하였다.
그후로도 십자군 원정은 6차, 7차, 8차, 9차로 이어지지만 한결같이 실패로 끝난다. 성지를 사라센으로부터 해방하지도 못하고 십자군 원정이 끝날 무렵에는 오히려 도나우강 유역은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십자군 전쟁의 영향과 결과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지 못하였지만 그 후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베이루트,트리폴리,예루살렘,키프로스,알레포,콘스탄티노폴,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제노바,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 경제에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1096년 처음 고향을 출발할 당시 무지한 농부 십자군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귀족들도 멀리 다른 지역으로 가본 일도 없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이교도와의 전쟁을 마치자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다른 문명권의 문물을 흡수하고 또한, 교역으로 발전하였으며 전 유럽의 사상에 자각과 반성의 계기를 삼게되었고 교육에 회기적인 변화를 도모하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이 종결되는 시점으로 부터 유럽은 중세의 어둡고 삭막한 터널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권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기독교적인 엄격한 권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더욱 가속적으로 분권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동질성을 부여해왔던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화되자 각 나라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각개약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