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트리에 걸린 달 3.
8.
신일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수평선 너머로 어스름하게 동이 터온다. 어느 곳에서나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 섬이 그는 좋았다. 언덕 아래에 늘어선 집들은 둘레에 담장도 없고, 마치 성냥갑을 쌓아놓은 듯 얼기설기 이어져 큰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쉽게 날아가 버릴 듯 위태해 보이기만 하다. 길가에는 커다란 야자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고 그 아래로 비릿한 바다의 향이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코끝을 스친다.
그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신학교 2학년이 되어 여름방학이 되자 나혜 등과 같이 이곳으로 단기선교를 나왔다. 다른 이들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 돌아가지 않고 아직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섬사람들의 전혀 때 묻지 않은 순박한 품성도 좋았지만, 자신을 이곳에 붙들고 있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혜와 같이 있는 것이 더욱 좋았다. 이곳에서만 10여 년을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는 강 목사가 어제 볼 일이 있어 마닐라로 나갔다. 아마도 그가 돌아오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것이다. 필리핀 남부의 술루 지역에 있는 이곳 졸로 섬은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 신자이다. 가끔 가톨릭계 주민과의 대립으로 치안이 불안정할 때도 있지만, 그는 전혀 무섭다고 느껴보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에서 온 그를 이곳 사람들은 친절하게 대했다. 다만,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처음 보는 이방인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대하며 집을 나서기만 하면 뒤에서 졸졸 따라다녔다. 그들은 곧 그와 친해졌다. 그가 한국에서 가져간 티셔츠나 생활용품들을 나누어 주자 그들은 쉽사리 구하지 못할 귀한 생필품인지라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그래서 보답으로 마을 아낙들은 그에게 가끔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다.
바닷가는 굴러서 가도 한걸음에 다다를 거리에 있었다. 언덕을 내려서면 바로 백사장으로 연결된다. 넘실대는 파도를 따라 햇살에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파란 물결에 쓸려 보석처럼 빛났다. 그는 백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모래의 감촉을 즐겨 보았다. 어느덧 환히 밝아진 주변으로는 맑은 새벽 공기가 막힘없이 흐르다 호흡을 통해 그의 폐로 들어가 어느덧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놀라운 자연의 신비여. 얼마나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움인가.
신일이 다시 언덕을 올라 되돌아 집에 다다랐을 때 한 동네 아낙이 그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하였다. 아낙은 수줍게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 하나를 그에게 내민다. 그들이 자주 먹는, 감자와 토마토로 맛을 내고 돼지고기를 뺀 메누도와 닭 내장을 튀긴 블락락이었다. 블락락은 어느새 그도 꽤 정이 들었다. 어찌 보면 한국의 닭튀김과 같은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모양이 꽃처럼 예쁘게 수놓아진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꽃이란 의미인 블락락이란 예쁜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그가 집에 들어서니 나혜는 깨어 있었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머릿결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어디 갔다 와? 새벽부터." 그녀가 생긋 웃으며 그에게 미소 짓는다. "응, 바닷가에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이야." 그도 그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젊음은 언제나 혈기가 왕성하다. 어쩌면 그것은 인생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다. 물이 올라 윤기가 도는 여름의 푸른 잎을 보라. 신선함은 생동감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론 자신을 사르는 불꽃처럼 격정적이 되기도 한다. 그가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그의 얼굴을 가까이 대자 그녀의 눈가에는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둘은 자연스레 입술을 포개고 서로의 체취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안겨있는 그녀의 빨라진 심장 박동 음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되었다.
둘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이제 신일과 나혜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둘만의 은밀하고 진한 서로의 사랑을 나날이 새롭게 확인하였다. 낮에는 간간이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가끔 바닷가에도 나갔다. 모래사장 끝에는 구릉 진 언덕이 길게 이어졌고 언덕 너머로 언제 생긴지도 모르는 종유석 동굴이 있었다. 동굴 입구까지 들어오는 바닷물을 건너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보면 기기묘묘한 형상의 종유석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동굴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듯 오렌지빛으로 빛났다. 그가 손을 둥그렇게 모아 힘차게 소리쳤다. “사랑해. 나혜야!” 그러자 그녀도 수줍게 따라 외쳤다. “영원히” 둘의 외침은 입구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따라 동굴의 벽을 타고 막힌 곳을 돌아 색다른 소리로 큰 울림이 되어 돌아 나왔다.
신일과 나혜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혜의 집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2주 일정으로 나갔던 단기선교 여행에서 연락도 없이 한 달을 넘기고 그녀가 돌아오자 처음에는 걱정과 우려였던 심정이 종국에는 분노로 변한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의 집에서는 비난의 화살을 신일에게 돌렸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에게 열화같이 성을 내며 화를 내었다. 그를 찾아온 그녀의 어머니는 심한 욕설과 함께 그의 지난 과거까지 들먹이며 나혜로부터 당장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가 다니는 신학대마저 다니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돌아갔다.
그는 크게 상심하였다. 이제 나혜와 헤어질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그녀 집안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도저히 둘의 관계를 지속해서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사랑이 깊어갈수록 그의 번민도 커져만 갔다. 그녀 집안의 감시와 제약으로 그녀를 만날 수 없는 시간도 길어지자 마침내 그도 흔들렸다. 과연 그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를 위해서 자신이 할 방법이 무엇일까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가야 할 길이 따로 있었다. 큰 빛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바에야 자신의 안일과 세속의 사랑 같은 것은 어차피 계산 밖의 일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선택할 방법이 그다지 많지 않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떠남으로써 나혜에게 도움이 된다면 과감히 자신의 욕망을 버려야 했다.
그는 떠나기로 하였다. 나혜와 그리고 그동안 살았던 이 땅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어쩌면 그 일은 이미 오래전에 그에게 예정되어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이든지 부르심을 받고 충실히 그의 임무를 수행한다면 다만 그것이 그의 본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나혜에게는 일부러 모질게 대했다. 그녀가 이해해준다면 다행이지만 설사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는 그녀에게 부러 네가 싫어져서 떠난다고 말하였다. 비록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렇게 그는 떠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두 발로 살아서 다시는 이 땅을 밟지 못하게 될 줄은 그때에는 신일도 미처 몰랐다.
나혜는 신일이 떠난 후로 심각한 정신적 공황을 겪게 되었다. 물론 집안의 반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만한 이유로 그가 자신을 떠날 줄은 몰랐다. 둘의 사랑으로 서로가 이해하고 버텨나간다면 언젠가는 충분히 극복할 문제이고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 집안의 반대도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 의지가 약한 줄은 몰랐다. 아니 자신에게 보여준 지난날 그의 사랑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처럼 자신에게 모진 말을 던지고 떠난 그를 그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의 방황은 길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하루하루가 이토록 참담하고 괴롭기만 한데 그는 자신을 떠나 유유히 살아가리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오기가 생겼다. 그러나 나혜는 그의 소식이 미치도록 궁금했다. 한 번만이라도 그를 다시 만나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9.
정 기사는 전화를 걸어온 여자 손님과의 약속시각이 얼추 되었다고 생각하고 로비 앞으로 나갔다. 아직도 호텔 로비 입구에는 경찰차가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다만 응급차만이 이미 상황을 수습하고 떠났는지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 웅성대며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흩어졌고 프런트 직원들도 많이 차분해진 모습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로비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조슈아 트리까지 가는 손님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어느덧 약속시각보다 5분을 지나고 있었다. 입구 계단 앞에서 다소 초조해진 심정으로 정 기사가 서 있는데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길가에 한 여인이 정 기사를 향하여 손짓하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여 정 기사가 달려가 물어보니 생각대로 전화를 걸어온 여자 손님이 맞았다.
손님은 젊은 아가씨였다. 수수한 차림을 한 아가씨는 단정해 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표정으로 심히 불안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로비 앞으로 나온다더니 길가에서 그를 부른 것도 이상하였다. 하지만 오늘은 호텔 로비에서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며 정 기사는 더는 묻지 않았다. 아가씨는 조슈아 트리로 가는 내내 별말도 없이 어떤 생각을 골똘하게 하는지 창밖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출발했을 때는 차들이 그다지 밀리지 않았는데 갈수록 점점 정체가 심하였다. 힘들게 조슈아 트리 빌리지에 도착해보니 어느덧 해는 기울고 주변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가씨는 산으로 올라가자고 부탁을 하였다. 정 기사는 돌아갈 길이 멀어 곤란하다고 하였지만, 차비를 두 배로 준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공원 입구를 지나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랐다. 도로가 2차선으로 바뀌고 쭉 뻗은 직선도로는 이제 나타나지 않았다. 속도를 낮춘 채 산을 오르다 보니 점점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해진다. 가로등도 별로 없는 칠흑처럼 어두운 산길을 조심스럽게 올라 드디어 공원의 3,000피트 정상에 다다랐다. 주위는 어둡기만 하고 이곳에 처음 올라와 보는 정 기사는 낯선 풍경에 어쩐지 불안해졌다. 지금 있는 이곳이 정상인지도 파악하기가 곤란했다. 희미하게 앞쪽으로 바위산의 형상만이 어슴푸레 보인다.
세우라는 곳에 정 기사는 차를 세웠다. 어느덧 지나가는 차량은 한 대도 없고 다만 어둠 속에 주위는 고요하기만 하다. 산새와 산짐승도 일찍 잠이 들었는지 이상스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가끔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만이 싸늘하게 느껴진다. 멀리 보이는 삐죽삐죽 튀어나온 조슈아 트리의 가지들이 무서운 짐승 같기도 하고 어쩌면 악마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하며 마치 무섭게 달려들 듯하다. 정 기사는 이런 상황에서 아가씨를 놔두고 혼자서 돌아간다고 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가씨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혼자서 산에 오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정 기사를 기다리게 했다가 다시 돌아가려 했는지도 불명확하다. 그러나 아가씨는 정 기사에게 차비를 계산해 주면서 고맙다고 짤막하게 이야기하고는 앞쪽으로 추적추적 걸어갔다. 정 기사는 멍하니 아가씨를 바라보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서 있는 앞쪽으로 절벽이 있는지도 모른다.
정 기사는 아가씨가 걸어간 곳으로 황급히 달려가 보았다. 아가씨는 그리 멀지 않은 우뚝 솟은 바위 앞에 앉아서 오열하고 있었다. 정 기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하는 아가씨를 바라보며 잠시 어찌해야 할지 고민을 하였다. 인적도 이미 끊긴 어두운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의 외딴 바위 앞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긴 아가씨를 한동안 망연히 바라보던 정 기사는 조용히 아가씨에게로 다가갔다. “아가씨,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정 기사가 주저하며 말을 건네자 아가씨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울먹이며 외마디 말을 토해낸다. “내가… 내가 그이를 죽였어요.” 정 기사는 쥐어짜듯 새나오는 아가씨의 말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의미인지 정 기사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10.
황무지에 뿌리를 박고 사는 조슈아 트리의 모습과 주변 경관은 마치 거친 광야를 연상케 하였다. 나혜는 신일이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 궁금했다. 그동안 신일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혜가 예전에 보아왔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치열하게 세상과 투쟁하며 자신의 처지를 고민하던 세속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훨씬 부드럽고 포근한 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신앙적인 성숙이 더해져 그를 다르게 변모시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혜는 신일을 사랑한다. 한시라도 그를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버렸다는 배신감에 잠시 흔들렸지만,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미국으로 한걸음에 달려온 것도 단지 그를 만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녀는 그와 다시 사랑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다. 오직 신앙에 대한 열정만이 그를 지배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이제라도 다시 그가 자신만을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염없이 안타까운 시간만 흘렀다.
추수 감사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온 조슈아 트리는 한산하기만 하고 가을비까지 겨울을 재촉하듯이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저 멀리 정상에는 눈발이라도 날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혜는 그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새삼스레 가슴이 떨려옴을 느낀다. 예전 필리핀에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혜는 그에게 물었다. "신일아, 나 보고 싶지 않았어?" 그녀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는 잠시 주춤했다. "나는 너를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어." 그녀는 그를 보며 계속 말했다.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아무 대꾸가 없었다. "왜, 말이 없어?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녀는 초조해졌다. "나는 사랑하는 분이 따로 있어." 그녀를 외면하며 그가 비로소 말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결혼하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 목사님들도 다 결혼해서 살고 있잖아." 그녀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여전히 그는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나는 자신이 없어. 하나님과 너를 같이 사랑할 자신이…” 조슈아 트리 사이로 내리던 빗물이 희끗희끗한 눈발로 바뀌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어딘가 공허하기만 하다.
"내 눈을 봐.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어 네가 있는 이곳 미국까지 왔어." 그녀의 목소리도 이젠 촉촉이 젖어든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잠시 후 그녀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나혜야, 나는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의 대답이 찬 바람을 타고 허공을 스치며 스러졌다. "아냐, 그렇지 않아. 딴 사람은 몰라도 나는 너를 알아. 너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는 마치 자신에게라도 다짐하듯 강한 억양으로 그의 말을 부정하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잠시 흔들렸다. "나는 이제 하나님만을 사랑해. 지난날을 속죄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소명 받았어." 그러나 그는 건조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시는 남녀 간의 사랑은 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는 옷을 전부 벗고 완전한 나신이 되었다. "나를 봐. 나의 몸은 옛날 그대로야.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나혜라고. 나의 몸 어딘가에는 네가 사랑했던 흔적도 남아 있을 거야." 그녀가 애절한 눈빛으로 울부짖듯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그녀의 옷을 집어들고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녀는 뿌리쳤다. 그리고 그에게 또다시 무작정 달려들어 그를 다시 껴안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냉정하게 그녀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나는 이미 너를 사랑하지 않아."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것인지. 쏟아지는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내린다.
정 기사는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밤이 깊어갈수록 산중 기온은 점점 내려간다. 잡념은 늘어가고 무서움은 깊어만 간다. 높고 넓은 황무지 산속에 홀로 깨어 있다는 외로움은 생각보다 견디기 어렵다.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니 조슈아 트리가 성큼 다가서 있다. 얼핏 보면 커다란 선인장 같기도 한 나무는 땅속으로 11미터 이상의 뿌리를 박고 산다. 독특하고 강한 생명력의 뿌리는 삶의 원천인 물을 찾아 척박한 황무지의 이곳저곳을 헤맬 것이다. 그렇기에 나무는 일 년에 3.8센티미터밖에 자라지 못한다. 나무가 자라고 살아가기엔 너무 거친 세상이었다. 수분도 메마르고 한낮의 강렬한 햇볕도 가릴 수 없는, 오직 거친 바람만이 매서운 허허벌판에 나무는 벌거숭이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그렇게 천 년을 산다. 열악한 황무지에서도 굵은 가지를 맺으며 푸른 잎을 띄우고 그래도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별이 쏟아질 듯하다. 북쪽 하늘은 두 개의 산봉우리 사이로 낮게 내려앉았다. 지상에서 많이 올라왔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하늘의 별들이 마치 손만 뻗으면 닿을 듯 무척이나 가깝다. 북두칠성이 보이고 국자 손잡이 쪽으로 뻗어 나간 끝자리에는 북극성이 우뚝 자리하고 있다. 바로 그 연장 선상에 카시오페이아가 선명하게 W자 모양을 하고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과거에 북쪽 하늘을 바라볼 때는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별자리들이 어쩌면 이리도 가깝게 모여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무척이나 신비한 광경이었다. 시간을 보니 자정이 살짝 넘었다. 아가씨는 아직도 바위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녀가 휘두르는 칼날에 당황하며 쓰러지는 신일의 모습이 떠오른다. 달려드는 그녀를 제지할 사이도 없이 빠르게 휘두르는 그녀의 칼을 맞고 그는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나쁜 놈!" 그녀는 악을 쓰며 신일의 가슴과 배를 향해 연신 칼을 꽂았다. 신일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녀의 칼을 맞고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밤하늘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늘과 봉우리와 그가 비로소 한몸이 되었음을 느낀다. 바람도 잠시 멎은 이 밤에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찬란히 빛나고 그 아래 내려앉은 산봉우리에 그가 서 있다. 갑자기 휘황찬란한 별 사이로 별똥별 하나가 긴 꼬리를 그리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친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하늘가 시선 끝나는 곳에는 커다란 조슈아 트리가 보인다. 그 옛날 양팔을 높이든 채 하늘에 간절한 기도를 올렸던 여호수아의 실루엣이 스쳐 지나간다. 가지 사이로 커다랗고 둥그런 달이 걸려 있다. 달을 바라보며 그의 머릿속에 울려오는 알 수 없는 큰 울림에 귀를 기울였다.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