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는 이야기 -♧/역사와 예술

선생은 가셨어도 우리 가슴 속의 별이 되리니

달빛산책012 2012. 8. 17. 00:30

 

한국 근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6 ·25전쟁을 겪는 등 격동기의 한국 근대사가 그만큼 침체하였고 변화무쌍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시시각각으로 밀어닥치는 어려움 속에 개인의 안위는 보장받지 못했다. 따라서 정신적 공황기의 허무함은 민족의 응집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사실 인물이 없었다기보다는 해방 후에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정권의 취약성과 당시 정세의 열악함으로 친일파가 득세하여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좌우의 극심한 대립과 전쟁통에 이제는 친일파가 정권의 하수인이자 우파가 되어 과거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빨갱이로 매도하고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려 노력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사상계'를 발행한 언론인이자 야당 정치인으로서 반독재에 맞서 치열한 삶을 살다간 장준하 선생이 있다. 무려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무릅쓰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맞섰던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뒤 그동안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장준하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대위로 있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제의 만주군 중위로 극명히 대조되는 길을 걸었다. 장준하 선생은 언젠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을 준 일도 있다고 한다.

 

광복군 장교로서 1945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중국 시안에서
미국 정보기관(OSS) 특수 훈련을 받던 당시의
장준하 선생(오른쪽)과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가운데), 노능서 선생.

 

친일 잔재를 거둬내고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작업은 지지부진하였고 민족의 자존심은 그만큼 땅에 떨어졌다. 고위 요직에 포진하고 득세한 친일파와 후손들은 집요하게 친일청산 작업을 체계적으로 방해하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당면한 현실은 민족정기 회복보다는 생존권 보장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로 당시 친일파와 후손들은 지금 떵떵거리고 살고 있지만, 독립유공자의 자손들은 단칸 월세방을 전전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분단은 계속되고 정권은 유지되어도 변화된 모습은 없다. 아예 요즘은 친일 청산이란 과거의 케케묵은 허접하고 진부한 타령으로 치부하는 모습이다. 심지어 포악했었던 일제의 처참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일은 불가피했기에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고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강변한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화에서 인용하여 휴머니즘에 투철한 박애 정신을 갈파하는 듯한 이 말은 물론 현실적으로 맞는 이야기도 될 수 있지만, 진정성을 호도한 물타기 전략이다. 그 시절에 견디기 어려운 옥고를 치르다 차가운 감옥에서 죽어나가고 바람 부는 만주 벌판에서 배곯으며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도 없이 수 없이 죽어간 선조의 죽음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장준하 선생은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1944년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됐으나 곧바로 일본군을 탈출했다. 그는 고향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내가 형제와 골육을 위하는 일이라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이는 원하는 바이라.’라는 성서의 바울이 말한 구절을 남겼다. 편지에 이 구절이 적혀 있으면 일본군에서 탈출했다는 뜻으로 알라는 귀띔도 하였다.

 

 

장준하 선생은 1944년 7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한 뒤 중국군을 거쳐 그해 11월에 53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 길을 걸어 백범 김구 산하의 광복군에 합류했다. 박정희 정권은 한 해에 두 번씩이나 세무사찰을 하는 방식으로 '사상계'를 압박했고 선생의 가족들에 대한 핍박은 극심했다고 한다. 

 

일제에 아부하여 평안을 구하며 따뜻한 방 안에서 술잔이나 기울이다 가끔 민족과 국가를 염려하던 사람들이 대단한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그들을 죽이고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은 치부에 열을 올려 삼대까지 번성한다. 전쟁 때 총알이 빗발치는 고지에서 쓸쓸히 죽어가던 선조는 또 무엇인가. 용서와 관용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다. 용서를 구할 사람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선다. 이런 현실에서 그 누가 국가를 위해 희생하려 하겠는가. 본말이 전도되고 민족정기회복은 요원한 현실이다. 

 

 

고 장준하 선생의 아들인 장호준 목사는 코네티컷주 맨스필드라는 시골 마을에서 목회자로 살고 있다. 평일에는 스쿨버스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교회에서 사례비로 단지 400달러만 받는다며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일이 스쿨버스 운전사다. 장호준 목사는 스쿨버스 운전을 하는 이유로 “여긴 시골이라서 숲이 우거진 길이 무척 아름답다. 혼자 묵상하고 기도하기에 버스 운전만큼 좋은 게 없다. 혹시 생각 있으신 목사님들께도 버스 운전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돈도 받고, 기도도 하고,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버스에 타고 내리는 아이들의 웃음도 덤으로 얻는다.”라고 말했다. 장호준 목사의 미소 짓는 얼굴이 아름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