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베어 호숫가의 가을 풍경
샌 버나디노의 높고 험한 산을 힘겹게 오르는데 어느덧 중턱에 이르러보니 붉은 석양이 산마루에 걸렸다. 서편 하늘을 타오르는 불길로 화려하게 물들인 노을은 소리 없이 깊어만 가고 불길을 머금은 구름은 이글거리는 광염의 손짓으로 산등성이를 온통 검게 불태우다 그마저 모자란 듯 기다란 혀를 놀려 태양을 아스라이 가로지른다.
굽이진 산길은 정상을 향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창밖으로 슉슉 지나가는 찬 바람이 조금 열린 문틈으로 어느새 새어 들어와 제법 손을 시리게 하건만 그래도 병풍처럼 둘러쳐진 곧게 솟은 침엽수는 푸른 기운이 청청하다. 다만 길녘에 누운 이름 모를 들꽃만 계절을 거스르지 못해 노란빛을 띄우다 어느덧 스스로 퇴색해져 시들어만 간다.
삶의 치열함은 산 아래에 다 버린 채 맑은 영혼만 가지고 산에 오르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간다. 따라서 쇠약해져 가는 육체와 함께 열정도 식어간다. 그러나 집착이야 어디 가랴. 그래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제각기 버리고 온 치열함이 없어 다소간 여유로울 것이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대부분 외길이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 다다를 것이란 굳건한 믿음으로 젊은이나 노인이나 묵묵히 이어진 길을 따라 걷는다. 뒤돌아보면 저 멀리 도시의 불빛 아래 어지럽게 길이 교차하고 늘어선 회색빛 빌딩 사이로 고뇌하던 지난날의 욕망이 있다.
정상에 올라 잠시나마 가쁜 숨을 내쉬며 사위를 돌아보니 제법 노랗게 물든 사시나무 잎이 눈길을 끈다. 시간이 가고 계절이 돌아오면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은 이곳에도 예외가 없다. 이마의 성근 땀방울을 식혀주는 지나가던 산들바람에 묻어 어디선가 잔솔가지 타는 냄새가 피어오른다. 이제 해도 저물어가는 나무숲 속에서 느끼는 따사로운 그리움이란.
가을날의 숲 속에서 코끝으로 느끼는 잔솔가지 타는 냄새는 지난날의 정겨운 그리움이다. 해도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어둑한 산등성이에서 바라보던 시골 초가집 굴뚝에서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연기 속에 어김없이 마른 잔가지 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궁이에서는 불길이 일어 오르고 부뚜막 위에 걸린 가마솥에는 고슬고슬한 저녁밥이 김이 나며 익어갔다.
빅 베어 호숫가에는 가을이 완연하다. 이어진 산줄기 아래로 호수가 자리하고 잠시 바람도 멎은 듯 수면은 잔잔하기만 하다. 나무다리 아래로 한가로이 오리가 노닐고 줄기에 매달린 나뭇잎은 노란 옷을 입었다. 불현듯 호수로 떨어지는 잎을 무심히 바라보니 가을은 정녕 쓸쓸하기만 하다. 화려한 색을 덧씌운 나뭇잎도 어쩌면 흐르는 물줄기를 거스를 수 없음이랴.
선착장에 매여있는 배들도 적막함은 어쩔 수 없다. 겨울이 오면 바라보이는 앞산 위에는 하얀 눈이 차곡차곡 쌓일 테고 얼음 얼은 나루턱에는 덩그러니 뱃마루가 나뒹굴 때 알록달록 배들은 이미 치워져 버릴 테다. 산에서는 정신을 모으고 바다에서는 가슴이 열린다고 하였던가. 물은 흐르니 지금 서 있는 이곳은 과거가 아니요, 다만 새로운 현재일 뿐.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호수는 다만 그 자리이다. 그러나 느낌은 항상 새롭다. 지난봄에 보았던 푸르름도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던 시원함도 가을이 되니 어쩐지 길 위에 뒹구는 솔방울처럼 푸석하다. 9월을 뜨겁게 달구던 태양도 10월의 찬 바람 앞에 지친 듯 맥이 풀렸다. 여름날의 교만함을 가을날에 겸허히 내려놓고 호숫가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돌아선다.
(음원제공 YouTube : 조동진 - 작은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