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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닐 다리는 없지만 날아다닐 날개가 있다

달빛산책012 2013. 2. 25. 12:56

 

나에겐 걸어 다닐 다리는 없지만 날아다닐 날개가 있다.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를 접목하고 멕시코의 전통적인 토속 문화를 결합하여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화려하게 창시한 작가.

 

비록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힘들게 살았지만,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뜨겁게 태우며 살다간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육신은 갈기갈기 부서져 시시각각 밀려드는 처절한 고통과 힘겹게 싸웠지만,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바친 순수한 사랑은 배정하게 배신당해 안식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지만 그럴수록 타오르는 삶의 투지와 그녀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강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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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을 입은 자화상, 1926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Frida Kahlo de Rivera, 1907 - 1954)는 멕시코의 근대 미술을 세계적으로 알린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원래 이름은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Magdalena Carmen Frieda Kahlo y Calderón)이라는 기나긴 이름이었지만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한 후 프리다 칼로로 불렸다. 프리다(Frida)는 평화를 뜻하는 독일어 Friede를 바꾸어서 만든 말이다.
 
어린 시절에 커다란 교통사고를 겪은 뒤 평생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당시 떠오르던 공산주의를 신봉하여 여러 모임에 참가하였고 10월 혁명의 주역이었던 트로츠키와도 만난 적이 있으며 역시 화가이자 멕시코의 혁명가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와 많은 나이 차이에도 결혼하였다.
 
그녀는 6살이 되던 해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일찍부터 겪어야 했던 질병으로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그녀의 처절한 외로움은 결국 그녀의 자의식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평생 그녀는 소아마비에 걸렸던 오른쪽 다리를 스스로 혐오하게 되었고 말라 비틀어진 그녀의 다리를 감추기 위해 긴 치마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부서진 기둥, 1944
 
 
사춘기이던 18세에 프리다는 그녀가 타고 있던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그녀는 온몸의 뼈를 조각조각 맞추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녀는 이 사고 때문에 평생 헤어나지 못할 기나긴 고통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척추를 심하게 다쳐 움직이지 못한 채 한동안 누워 지내야 했고 이때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침대에 누워서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이 시절 견디기 어려웠던 힘든 육신의 고통과 그러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행복감을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술회하곤 했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진실로 행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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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디에고. 1943
 
 
전 세계적으로 거세게 일었던 페미니즘 운동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프리다 칼로는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화가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평생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로 말미암은 교통사고이다. 부서진 척추로 근 20년 동안 육신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두 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의 만남이다."
 
22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42세의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게 된다. 당시 벽화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던 디에고와 그녀는 뜨거운 사랑을 하게 되고 결국 결혼하였지만 계속되는 임신 중절과 디에고의 바람기로 그녀의 결혼 생활은 절대 순탄치 않았다.
 
교통사고로 다친 몸과 선천성 자궁 이상으로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여러 번 임신 중절을 한다.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 그녀는 아이의 출산을 간절하게 원했지만 결국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해 깊은 상실감과 좌절에 빠지게 된다.
 
또한, 그녀의 남편인 디에고는 그녀의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를 맺었고 그녀의 친한 친구와도 관계를 맺었다. 이때 받은 그녀의 정신적 고통과 상실감은 그녀를 나락에 빠뜨릴 만큼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이후 별거와 재결합을 반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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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탄생, 1932
 
 
그녀는 생전에 멕시코인 최초로 그녀의 작품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다.
 
프리다가 프랑스에 초청되어서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의 작품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녀는 유럽의 당시 유명 화가들과도 깊고 넓은 친분을 맺었다.
 
앙드레 브르통, 이브 탕기, 피카소 등과 같은 유명 화가들에게 찬사와 환대를 받았고 칸딘스키는 그녀의 그림에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포옹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47세에 폐렴으로 사망한 프리다 칼로는 사망하기 전날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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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치마가 저기 걸려있다, 1933
 
 
 
그녀는 평생 지녔던 고독감과 친구처럼 그녀를 수시로 찾아들었던 고통을 캔버스 위에 초현실적 그림으로 승화하였고 사랑을 이루지 못한 정신적 상실감과 2세를 갖지 못한 슬픔을 물감으로 진하게 채색하였다.    
 
또한, 힘들고 어려웠던 삶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강한 의지와 인내로 자신의 재능을 작품으로 세상에 표출하였다.  
 
고독하였지만 절대 고독하지 않았고 힘들었지만 다만 힘들지 않았고 불행했지만 항상 행복하였고 사랑받지 못했지만 언제나 사랑한 화가 프리다 칼로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꽃피운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