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2012. 10. 21. 07:00♧- 사는 이야기 -♧/삶을 말하다

한 사람이 현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나에게 시련만을 주시냐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따라가려 하는데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이 버겁다고 호소한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시련이 너무도 이겨내기 어렵고 괴로워서 흔들린다 하였다. 이러다 실족할까 두렵다고도 하였다.

 

하나님은 과연 한 인생에서 그리도 잔인한 존재일까? 아니면 그 인생을 쇠와 같이 풀무질하고 담금질하기 위한 과정이었을까?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존재이다.

 

인생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고 평탄하다면 사실 하나님을 찾을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인생이 항상 순항만 거듭할 수는 없는 일. 가다 보면 폭풍우도 만나고 때론 암초에도 걸리는 것이 인생이다. 어려움을 만나면 너무도 쉽게 하나님을 찾게 된다. 

 

자신의 소망을 기원한다. 나름 열심을 내어 기도한다. 그러나 어려움은 쉬 거치지 않는다. 사실 어려움이 쉽사리 해소된다면 어려움이라 할 수도 없다. 하여 낙담하고 절망하게 된다. 절망이 깊어지면 인생이 고달파 원망도 따른다. 종국에는 하늘에 삿대질까지 하게 되는 패악으로 치닫게 된다.

 

처음부터 불신자라면 하나님을 따로 욕할 일도 없다. 믿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무슨 근거로 욕한단 말인가. 그러나 온전히 스스로의 행위로 주신 것이 아닌 다만 값없이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어쩌다 열심으로 기도하였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 결국 자신과 하나님을 등지게 된다. 차라리 몰랐다면 불경죄라도 덜었을 것을.

 

남과 비교하게도 된다. 세상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조리와 불공평이 판을 친다. 도처에 정의가 사라지고 부도덕함만이 뒤덮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불만이다. 얍삽하고 약삭빠른 자가 떵떵거리고 잘살기에 생각하기에 자신은 언제나 뒤처지고 또한,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돌아볼 일이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했는지. 또한, 어려웠을 때 잠깐씩 드렸던 기복 기도에 얼마나 자신의 이기심이 담겨 있었던지.  

 

아니키우스 보에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보편적 예지와 의지의 자유, 이 둘은 언뜻 생각하면 모순되는 정반대의 개념인 듯하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알기 때문에 어떤 실수도 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미래의 사건으로 예견한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는 물론 인간의 생각과 욕망까지 미리 아신다면 의지의 자유는 있을 수 없다.

 

결코 오류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예견한 행동과 욕망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변해서 그 예견된 것과 달라질 수 있다면, 미래에 대한 확실한 예지가 아니라 불확실한 의견에 불과하다. 나는 하나님이 불확실한 존재라 생각지 않는다.

 

자신을 위한 믿음은 세상 어디에나 널려 있다. 무엇을 비판하고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믿는 것이 있다면 그곳에 기도하고 절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보다 남을 사랑하고 자신의 안위보다 남을 위해 헌신하고자 한다면 또한, 자신을 위해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우신 감찰자께 모든 것을 돌리고자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믿음의 정의를 새롭게 따져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