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3. 20:30ㆍ☆- 문학과 창작 -☆/소설이 걷다
달려.
달린다.
오늘도 달린다.
고독한 러너는 오늘도 달린다.
고독한 러너는 쉬지 않고 오늘도 달린다.
슉슉. 바람을 가르며 고독한 러너는 오늘도 달리고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달려온 이 길. 20년을 달려온 이 길은 이제 너무도 익숙해 눈감고도 달릴 수 있다. 출발선은 높다란 회색 빌딩 사이로 마치 키 자랑이라도 하는 듯 하늘로 솟다 만, 그러나 이제는 누렇게 퇴색한 팜 트리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러너가 20년 전에 이 거리로 왔을 때 처음 보았던 팜 트리는 지금처럼 퇴락하지 않았었다. 길 양쪽으로 우뚝 솟아 있던 팜 트리는 신선함과 쾌적함으로 이 거리의 상징 같았던 존재였다. 말쑥한 신사가 멋진 연미복을 빼입고 공연장이라도 가듯이 거리에 들어선 늘씬한 팜 트리는 이 거리의 자랑으로 회자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비가 오고 세찬 바람이 들이쳐 가지는 떨어지고 더운 여름의 폭염이 뿌리 등걸을 퇴락시켜 이제는 러너의 윤기 없는 머릿결처럼 희끗희끗 백발을 보이고 있다.
10분쯤 지나면 굴곡진 능선이 시작되고 얕은 양지 녘 둔덕에는 반가운 소나무 두 그루가 정답게 바라보고 서 있다. 눈이라도 현혹하듯 길가에 사시사철 피어나는 이름 모를 형형색색 빛깔 고운 꽃보다도 러너는 항시 그 자리에 소박한 푸른 기운을 담고 있는 소나무가 좋다. 그렇기에 러너는 멀리서 소나무가 보이기 시작하면 부러 걸음을 늦춘다. 조금이라도 소나무의 잔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동공에 확인시키듯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라도 달리기를 멈출 수는 없다. 뙤약볕 아래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질 때면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가고도 싶은 유혹이 샘솟는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러너에게는 어쩌면 쉴 권리는 애초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달리지 않는 러너는 러너가 아니다. 러너에게는 오로지 달리고 달리고 달려야만 하는 숙명 같은 의무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러너가 이 길을 달리는 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이 겹쳐진 필연이었을까. 러너는 달리다 길 가장자리에 떨어져 있는 검은색 가방을 발견하였다. 가방은 안에 들어있는 물체 때문에 마치 배부른 임산부의 배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러너는 가방 안의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렇게도 가방이 불룩한지 떠오르는 궁금증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아! 마침내 러너는 길 위에서 달리기를 멈추었다. 러너는 가방의 존재를 확인하고 과연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가방 안에는 백만 불의 거금이 들어 있었다. 가방을 채우고 있는 수북한 지폐 다발. 러너의 심장은 사정없이 뛰었다. 러너가 힘겹게 뛰고 있을 때에도 이처럼 심장이 뛰지는 않았었다. 러너는 사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그래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가방을 들고 뛴다 한들 쫓아올 사람은 없는 것이다. 러너는 서둘러 가방을 가슴에 품고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러너는 갑자기 가슴이 부풀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간다. 먼저 멀리 여행을 갈까. 그리고 근사한 집도 사야겠지. 아냐. 아냐. 항상 부럽던 바닷가를 떠돌던 우람한 마스트 꼭대기에 멋진 돛이 달린 배를 사야 할까. 러너에게 새삼스레 다가온 행운이 믿어지지 않았다. 러너는 신에게 먼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가방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아니 러너에게 갑자기 닥쳐온 행운에 불완전한 요소가 담겨 있었다. 가방은 밑바닥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러너가 달릴 때마다 흔들리는 가방에선 돈다발이 바닥으로 새어나갔다. 그러나 가슴 부푼 러너는 돈이 바닥으로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남이 볼세라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침내 돈 가방이 홀쭉해지고 러너가 무엇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때는 돈 가방에 그나마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러너는 갑자기 다가왔다 사라진 행운에 절망했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가. 신의 섭리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처음부터 가방을 집어든 러너의 행위는 자유의지였던가. 아니면 죄악에 빠진 인간의 범죄였던가. 그나마 러너는 이젠 돌아갈 수도 없다.
러너는 매일 절망한다. 소리 내어 신에게 올리던 기도도 할 수 없었다.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매일 절망하기에 그나마 가졌던 희망의 끈도 점점 사라진다. 기쁨은 잠시요 고통은 오래 지속되었다. 러너는 달린다. 오늘도 이 길을 달리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찾아왔던 행운은 좀처럼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신의 뜻으로 러너가 집어 들었던 가방은 비어 있었다. 필연인가. 우연인가. 하루에도 수십 번 오르내리는 신앙과 불신앙의 고개 위에서 러너는 가느다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오늘도 절망하고 또 절망한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수 없다. 러너는 달려야 하기에 오늘도 이 길을 달리며 기도한다. 주여. 부디 저를 외면하지 마시고 저를 세워주셔서 저에게 빛을 비춰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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