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트리에 걸린 달 2.

2012. 10. 13. 19:30☆- 문학과 창작 -☆/소설이 걷다

 

 

 

 

4.

  갑자기 우지끈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술 취한 사내가 입구 문을 부수기라도 할 듯 거칠게 열고 들어선다. 정 기사는 그동안 김 전도사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빠져들어 바깥쪽을 전혀 주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서 바라보니 사내는 큰소리로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혼자서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씨~발 놈. 택시 질이나 하지. 뭔 하나님을 믿으라고 지랄이야. 재수 없는 예수쟁이 자식들.” 김 전도사가 이내 사내의 상황을 파악한 듯 앞으로 나섰다. “아니 306호 손님 아니세요?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김 전도사가 아는 척을 해주자 사내는 더 큰 소리로 떠들었다. “아 글쎄 택시 운전사 놈이 예수를 믿어야 천당 간다고 그러잖아요. 가려면 저나 갈 것이지.” 306호 사내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문 바깥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지청구를 쏟아 놓았다. 김 전도사는 웃으며 사내를 달래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부축했다. 사내는 비척거리면서도 김 전도사를 따라 올라갔다.

 

  정 기사는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고양이 한 마리가 빠르게 뛰어가다 입구 쪽에 세워진 가로등 불빛 아래 잠시 앉아 몸을 추스르더니 살며시 사라진다. 하늘에는 얇은 초승달이 새파랗게 질린 채 떨고 있었다. 1월의 밤 기온은 아직 쌀쌀하였다. 정 기사가 점퍼의 깃을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주차장으로 차량 한 대가 들어왔다. 전조등 불빛이 바라보이는 벽을 위에서 아래로 훑고 퍼져 나갈 때 문이 열리며 짧은 치마가 다 감추지 못하고 드러낸 늘씬한 다리의 아가씨가 내렸다. 아가씨는 차가운 날씨인데도 얇은 꽃무늬 블라우스에 짧은 연둣빛 치마와 굽 높은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뒷머리를 웨이브로 살짝 멋을 부린 긴 생머리의 아가씨는 드러난 몸매로 보아 상당한 글래머였다. 글래머의 아가씨는 거침없이 정 기사에게로 다가왔다. 아가씨의 몸에서 프리지어의 깊고 달콤한 향이 난다. 정 기사는 잠시 여인의 향에 취해버렸다. 아마도 정 기사가 알지 못하는 비싼 향수를 쓰는가 보다. 아가씨는 정 기사를 그윽한 눈길로 한 번 쳐다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호텔 입구로 들어갔다. 정 기사의 시선이 걸어가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훑고서는 걸어가며 사뿐히 춤을 추는 빨간 구두에 고정되었다. 정 기사의 아랫도리가 대책 없이 불끈 솟는다. 그러나 정 기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었다. 라이터 불빛이 지나가는 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프리지어의 향은 아직도 정 기사의 코끝에서 떠나지 않고 빨간 구두의 좌우로 흔들리는 현란한 모습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정 사장님!” 정 기사가 문득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한 청년이 방금 들어온 차의 운전석에 앉아서 마치 정 기사의 심중이라도 헤아린 듯한 표정으로 정 기사를 바라보며 빙글거리고 있었다. “아! 김 사장. 난 또 누구라고.” 젊은 나이에도 속칭 나가요 걸을 공급하는 친구였다. 하룻밤 여자를 원하는 남자들에게 자신이 관리하는 아가씨들을 전화를 받고 호텔로 데려다 주는 포주와 같았다. “저번에 밀린 소개비 드려야죠.” 청년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정 기사에게 건넨다. “고마워. 김 사장. 그래 장사는 잘되나?” 정 기사는 왠지 가슴 한구석에 꺼림칙함을 느끼며 쭈뼛거리면서도 돈을 받았다. “뭐 알다시피 요새는 옛날 같지 않네요. 정 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셔야지요.” 청년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다 한 마디를 던진다. “아까 들어간 미연이. 꽤 괜찮아 보이지요?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아인데. 정 사장님도 생각 있으시면…” 청년이 활짝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윙크를 날린다. “아니… 뭐.” 정 기사는 청년의 말에 갑작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나중에 봬요.” 청년은 하하하 유쾌하게 소리 내 웃으며 떠났다.

 

  정 기사는 청년이 건네준 돈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착잡한 심정이었다. 돈이 궁해서 받기는 받았지만, 자신이 과연 이런 일까지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지 회의감이 물밀 듯이 밀려든다. 마치 똥물을 한 바가지나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남자의 삐뚤어진 욕정을 이용하여 불쌍한 여자는 자신의 몸을 팔고 또한, 그것에 기생하여 돈을 챙기는 한심한 일에 자신도 동참해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이제 거의 인생 막장에 자신도 이르지 않았는가. 정 기사는 불현듯 드는 자신에 대한 분노로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정 기사는 왠지 울적한 기분이 들어 주차장을 횅하니 한 번 둘러보고 입구 쪽 도로로 나가보았다. 지나가는 차도 한 대 없는 한적한 도로는 자못 고요하다. 무심코 돌아서던 정 기사는 가로등 불빛이 막혀 어둑한 팜 트리 아래 한 사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사내의 옆에는 커다란 여행용 가방도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사내는 몸을 웅크린 채 졸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숙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영하로 내려가는 기온은 아니니 저러다 설마 얼어 죽을 염려는 없다고 하더라도 제법 쌀쌀한 날씨가 걸렸다. 정 기사는 차마 사내를 건드려 깨우지는 못하고 멀찍이 서서 사내를 불렀다. 사내가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랐는지 움찔 몸을 일으켰다. 정 기사도 몸을 일으키는 사내를 보고 따라 놀라 여기서 자면 안 된다고 이르고는 찜찜한 기분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고 프런트에 앉아있던 김 전도사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김 전도사는 한 노숙자가 길에서 자고 있다는 정 기사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일어서 나갔다. 잠시 후 김 전도사는 정 기사가 아까 길에서 보았던 노숙자를 데리고 들어섰다. 노숙자는 생각보다 입성이 깨끗했다. 어두워서 잘 살펴보지 못했지만, 생김새도 단정하였고 아마도 오래 생활한 노숙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김 전도사는 사내를 입구에 있는 의자에 앉히고는 따뜻한 커피도 타다 주었다. 사내는 말없이 커피를 두 손에 쥐고는 커피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듯하였다. 갑자기 차가운 밤거리에서 따뜻한 실내로 들어와 사내의 뺨이 붉게 물들어갔다. 김 전도사는 사내와 몇 마디 나누더니 사내의 두 손을 꼭 잡고 뜨겁게 기도를 시작하였다. 정 기사는 김 전도사와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가슴이 먹먹하여 시선을 돌려 버렸다. 자신 같으면 신분도 알 수 없고 더럽게만 여겨지는 노숙자를 그처럼 가슴으로 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왠지 피해 가야만 할 존재처럼 여겨지는 노숙자에게 말없이 다가가 자신이 줄 수 없는 부분을 안타까워하며 기도해주는 김 전도사의 모습이 오늘따라 한없이 크게 보인다.        

 

5.

  신일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가진 첫 예배 시간이었다. 그날 설교는 로마서에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는 구절로 이어졌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성경을 두세 번 통독하였다. 어릴 때부터 김 목사는 어린 그에게 매일 성경 구절을 암송하게 하였다. 암송을 잘하면 그가 원하는 선물을 주었다. 그가 어릴 때 선물에 혹해서 무려 한 페이지에 달하는 성경 구절을 암송하기도 하여 그의 아버지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지루한 예배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그에게 강대 상 바로 앞에 앉은 한 여학생의 옆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짧은 양 갈래 머리에 새치름히 시선을 내리깔고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그만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녀와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여겨졌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왠지 모르게 자신과 꼭 맺어질 상대라고 느껴졌다. 10년 후쯤에 그녀와 결혼하여 부부로 지내는 모습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지루하였던 첫 예배 시간은 그녀 생각으로 오히려 황홀하게 흘렀다. 그녀의 이름은 나혜라고 했다. 그녀는 이후 가끔 교정에서 그와 부딪힐 때도 그를 무심히 지나쳤지만,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그녀에게 말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생각만이 입속에서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겨우 한마디 말이 되어 나올 양이면 이미 그녀는 멀리 지나간 후였다.

 

  보랏빛 라일락 꽃이 교정을 뒤덮고 그 향이 온통 코끝을 맴돌 무렵 그는 그럭저럭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그러던 차에 소위 학교의 짱이라고 하는 다훈이 어디선가 그의 소문을 들었는지 그를 학교 옥상으로 불렀다. 사실상 그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미 그의 가슴 속에 깊게 자리한 나혜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피해 갈 수 없었다. 신일이 옥상으로 올라가니 이미 많은 학생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학교 짱이 싸움을 한다는 소문이 학교 안에 돌자 학생들이 더욱 몰려들었다. 다훈은 명성에 걸맞게 그보다 키도 머리 하나는 커 보였고 어깨도 딱 벌어진 것이 천상 싸움꾼이었다. 다훈은 담배를 멋지게 꼬나물고 있다가 신일을 보자 "어이,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한다며?"라고 그를 도발하였다. 신일은 잠시 갈등하였다. 그때 신일은 옥상으로 향하는 문가에 나혜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신일도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그를 보고 있는데 어찌 사내대장부가 꼬리를 내리고 도망갈 수 있단 말인가.

 

  신일은 빨리 싸움을 끝내기로 작정하였다. 어차피 정식으로 싸우면 자신이 밀리는 싸움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부러진 대걸레 자루 하나가 굴러다녔다. 그는 재빨리 집어들고 무릎으로 내리쳐서 두 토막을 내어 한 개를 그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좋다. 빨리 끝내자." 다훈은 그의 그런 당찬 모습에 약간 질린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꼬리를 내릴 줄 알았는데 감히 자신에게 대적해 보겠다고. 좋아. 그래 한번 붙어 보자. 그가 천천히 윗옷을 벗었다. 이두박근이 보기 좋게 솟아 있었다. 그러나 신일은 이미 많은 경험으로 싸움을 잘 알았다. 맞짱(두 명이 싸움)에는 선빵(먼저 공격함)이 최고의 방법인 것을. 특히 밀리는 상대에게는 그 방법이 더욱 제대로 먹혔다. 그는 부러진 대걸레 자루를 손에 힘이 가도록 다시 한 번 움켜쥐고서 그의 어깻죽지를 노리며 몸을 날렸다. 보통 사람이 운동을 많이 하여 아무리 근육이 발달하고 몸이 단련되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취약부위는 있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어깨나 손목 또는 발목 그리고 관자놀이 같은 급소는 단련한다고 단련되는 것이 아니었다.

 

  다훈은 갑작스러운 신일의 공격으로 어깨를 먼저 강타당하고서 약간 움찔했다. 하지만 그도 이미 싸움으로 이골이 난 몸이었다. 신일의 얼굴로 그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신일의 코에서 피가 튀었다. 그때 나혜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였다. 신일은 잠시 정신이 아득하였지만, 곧바로 다훈의 손목을 내리쳤다. 다음에는 허벅지, 다훈이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는다. 그가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려고 팔을 그의 어깨 위로 힘차게 올리는 순간 나혜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귀청을 흔들었다. "신일아, 제발 그만둬."

 

6.

  정 기사는 온종일 기분이 우울하였다. 아내가 결국 병원에 입원하였다. 몇 달 전부터 소화를 전혀 시키지 못하던 아내는 며칠 식사를 하지 못하더니 오전에 쓰러져 마침내 응급실로 실려 갔다. 아마도 큰 탈이 나도 제대로 난 듯싶었다. 그러나 정 기사는 아내를 따라 병원에 가지 못하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님들의 전화가 폭주하여서 점심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채 이리저리 분주하게 타운을 누비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간간이 떠오르는 아내 걱정에 정 기사는 실수가 잦았고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비기사가 없는 정 기사는 일도 접지 못하고 다만 생각으로만 아내의 쾌유를 간절히 빌 뿐이었다.

 

  정 기사는 잠시 호텔 주차장에서 차에 탄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가 짧게 한숨을 쉬며 무심히 차 앞을 바라보았다. 대시보드 옆에 그와 아내가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매달려 있었다. '저 때만 해도 제법 날씬했는데…' 정 기사는 상냥하고 예뻤던 그 무렵의 아내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허릿살이 불고 터무니없는 잔소리쟁이로 변해버린 아내를 생각하며 그는 괜스레 혀를 끌끌 찼다. 정 기사는 지금 병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불쌍한 아내를 떠올리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히려 시시때때로 돈도 안 되는 택시는 그만 때려치우라고 앙탈을 부려대던 아내의 잔소리가 새삼 그리워진다. 그래 아내가 낫는다면 더욱 잘해주어야겠다고 정 기사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때 정 기사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김 전도사가 예전에 시간이 나면 한 번 읽어보라고 건네주었던 성경책이 떠올랐다. 정 기사는 김 전도사로부터 시큰둥하게 받아두었던 성경책을 지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차 안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성경책을 찾아 무턱대고 펼쳐 들었다. 기실 정 기사는 성경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어릴 적에 잠깐 다녔던 교회에서 들었던 목사님의 설교와 주기도문의 내용만이 기억날 뿐이었다. 펼쳐진 내용은 로마서였다. 정 기사는 애당초 로마서를 알 턱이 없었다. 누가 썼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 기사는 담담히 읽어내려 갔다. 성경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하고 기록되어 있었다. 정 기사의 마음이 일순 숙연해졌다. 계속 읽어 내려갔다. 성경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이어졌다. 정 기사의 두 눈에서 갑자기 폭포와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왜 자신이 우는지도 모르고 끝없이 울었다. 눈물이 떨어져 성경책을 적실 정도로 정 기사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역설적인 기쁨이 교차하는 이상한 경험을 하면서도 쏟아지는 눈물을 씻어내리며 그 자리에서 로마서 16장을 거푸 두 번이나 읽었다.        

 

7.

  신일은 꿈을 꾸었다.

 

  어딘가 모를 광장에 그가 서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주먹을 휘두르며 그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그들은 매우 흥분해 있었다. 과격한 일부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는 날라온 돌에 이마를 찢기며 피를 흘렸다. 결국, 그가 쓰러졌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돌을 피하려고 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군중을 제지하였다. 신일은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였다. 신일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곧 무리는 손에서 돌을 버리고 흩어져 버렸다. 그와 신일만 그곳에 남았다. 신일은 자기를 구해 준 그에게 매우 감사한 마음을 느꼈다. 신일은 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저는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저를 이제 벌하소서."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누가 그대를 벌주려 하는가? 누가 그대를 죄인이라 부르는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했지만, 너무나 강렬한 빛이 그의 뒤에서 그를 비추고 있었다. 신일은 눈이 부셔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의 음성이 다시 신일에게 들려온다. "심판은 너희 몫이 아니다. 너희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다." 신일이 다시 그를 바라보려 하자 어느덧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신일이 잠에서 깨었다. 몸이 물 적신 솜처럼 무겁기만 하였다. 그러나 따사로운 아침 햇살은 창을 헤집고 방안을 밝게 비춘다. 그는 일어나 책상 앞에 놓인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어느덧 길게 자란 머리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방구석 한 모퉁이에 널브러져 있는 소주병들과 함께 다훈이 심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오늘 할 일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삼거리 다방 미스 박에게서 먼저 수금을 하고 나중에는 몇 군데 술집을 더 돌아야 할 것이다. 그는 옆에 누워 있는 다훈의 다리를 툭 차며 그를 깨웠다.

 

  신일과 다훈의 싸움이 학교 측에 알려져서 그들은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어쩌면 좀 더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는 사안이었지만 교장 선생님은 이상스레 강경하였다. 일벌백계를 주장하며 학교 역사 이래로 이런 무지막지한 싸움은 없었노라고 그들을 마치 벌레 보듯 대했다. 신일의 어머니가 눈물로 호소하며 교장 선생님을 설득해 보려 했지만 역시나 허사였다. 그는 차라리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그는 아마도 순조롭게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를 퇴학당했지만, 반면에 소중한 친구를 얻게 되었다. 다훈과 나혜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학교를 그만두게 된 신일과 다훈은 다훈 선배의 일을 돕기로 하고 방을 얻어 같이 생활하였다. 그 일이란 것이 비록 사채업자의 수금원 생활이었지만 그는 비로소 집을 나와 독립하게 된 것이 무슨 승리의 월계관이라도 쓰게 된 것처럼 마냥 기분 좋았다.

 

  신일과 다훈은 늦은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삼거리 다방은 손님들로 꽤 붐볐다. 그들이 다방 안을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마담이 그들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미스 박은 작은 수족관이 놓여 있는 창가 쪽 의자에 앉아서 손님과 웃으면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보자 샐쭉한 표정으로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신일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어이, 너도 오늘은 바쁜가 본데 우리도 바쁘거든. 빨리 밀린 것 주고받고 얼른 끝내자." 그가 그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 오빠들 왔네. 오늘 왜 이렇게들 멋지게 빼입고 나섰니?" 그녀가 살짝 헤픈 웃음을 날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야! 바쁘다고 했지." 신일이 그녀의 너스레를 받아주지 않고 되받아치며 음성을 높였다. "이 오빠, 아침부터 왜 이래? 정말 별꼴이야."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며 파란 아이 라인을 그린 찢어진 눈초리가 살짝 들렸다. 이럴 때는 기선 제압이 우선이었다. "이런 쌍. 빨리 안 줄 거야? 너 정말 피곤하게 굴래?" 그가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눈을 치켜뜨자 그녀가 대번에 울상이 되었다. 다훈이 옆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들며 자리에 앉은 손님들을 쏘아보자 손님들이 다훈의 시선을 피하며 엉거주춤 일어선다.   

 

  "오빠, 오늘은 돈이 없어. 사실 어저께 공쳤거든. 내일은 정말로 줄게. 응?" 미스 박이 울먹이며 그에게 말했다. "너, 몇 일째 밀린 줄 알아? 자그마치 삼 일치나 밀렸거든. 오늘은 절대로 안 된다. 없으면 네 팬티라도 벗어." 신일이 그녀를 을러댔다. "에이, 시~팔. 나도 이판사판이다. 그래 없는 돈을 어찌 주겠니? 그래 벗겨 가라. 벗겨 가." 그녀가 갑작스레 악다구니를 친다. 신일은 그녀의 돌변한 태도에 화가 치솟았다. "뭐야? 이런 쌍!" 신일이 그녀를 기세 좋게 한 대 올려붙였다. "아이고! 나이도 어린 새끼가 사람을 치네. 그래, 죽여라. 죽여!" 그녀도 지지 않고 지청구를 퍼부었다. 그녀가 그의 멱살을 잡는 순간 신일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바닥에 내질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든다. "저리들 가~슈. 먼 구경났나." 다훈이 사람들을 제지했지만, 몰려든 사람들은 쉽사리 흩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나자빠진 그녀의 입가에 몇 방울의 피가 흘렀다. 입을 닦다 손에 묻은 피를 본 그녀는 서러웠는지 바닥에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때 어디선가 황급히 신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다가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신일아! 너,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니?" 어머니의 안색이 백지장같이 하얗다. "신일아, 제발 집에 가자." 그는 갑자기 수치스러웠다. 이런 곳에서 어머니를 대면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거북했다. 신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방을 빠져나왔다.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부르짖음이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소음 속에 곧 묻혀버렸다.

 

  그는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길가에는 다가올 여름을 예고하듯, 벙그린 하얀 꽃송이를 가지마다 줄줄이 매단 아카시아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꽃이 떨어져 눈처럼 날리는 나무 아래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러난 가지 사이로 바라보이는 하늘은 높고도 파랗기만 하다. 얼핏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파묻혔던 붉은 태양이 드러나 환한 빛을 발한다. 지난 꿈속에서 보았던 그 빛과 같이 밝았다. 심장은 방망이질 치듯 두근거리고 알 수 없는 눈물만이 신일의 두 눈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신일은 곧바로 달려가지 못했다. 어머니를 이런 모습으로는 도저히 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장 가족들의 시선도 곱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하루하루를 하릴없이 지내며 다만 빨리 이런 세월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불안하던 어느 날 수소문 끝에 누나가 신일을 찾아왔다. 어머니가 아주 위독하다는 것이다. 그는 누나와 함께 병원으로 향하였다. 병실 문을 들어서니 병상에는 그사이 더 수척해진 모습으로 어머니가 누워 있고 곁에는 아버지와 동생이 근심스레 서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파리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그는 누워있는 어머니를 보자 왈칵 눈물이 터졌다. 어머니는 힘없는 손짓으로 다른 가족들을 내보내고 그를 자신의 침상 옆으로 불렀다. "신일아, 너는 나의 하나뿐인 아들이야. 이 어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니?" 어머니는 말을 이어서 하기가 어려운 듯 보였다. 어머니의 기도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났지만 악착스럽게 힘겨운 입술을 움직였다. "네. 엄마. 말씀하세요." 그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가 안쓰러운 듯 어머니는 오히려 앙상한 그녀의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신일아, 이 어미가 없어도 너는 아주 꿋꿋하게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또박또박 마지막 힘을 다해 그에게 힘주어 말했다. "신일아,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잊지 마라." 어머니는 어렵게 이 말을 마치고는 기력이 소진한 듯 고개를 내려뜨렸다.

 

  어머니는 폐암 말기였다. 어머니는 그동안 줄곧 자신의 병을 가족들에게 숨기고 지냈다. 어머니가 신일을 삼거리 다방에서 우연히 만난 후로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이미 병세가 악화하여 손을 쓸 수 없었다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에 대한 가족들의 원망이 줄을 이었다. 어머니는 바로 신일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그들은 비난했다. 그는 그래도 할 말이 없었다. 시시각각 밀려드는 고통을 참고 생사의 기로에서도 오직 자신만을 염려하였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는 뼈저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신일은 다훈과 하던 일을 이내 접어버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귓가에 생생한 어머니의 말씀을 그는 도저히 지워버리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삼거리 다방에서 어머니를 뒤로한 채 길가에서 바라보던, 구름 위에 드러난 태양의 밝은 빛과 꿈속에서 나타나 자신에게 말하던 남자의 음성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이제야 비로소 그는 확신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