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병기 활

2012. 10. 15. 20:00♧- 사는 이야기 -♧/영화와 사진

 

[줄거리]

 

50만 포로가 끌려간 병자호란,
치열했던 전쟁의 한 복판에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위대한 신궁이 있었다.

 

역적의 자손이자 조선 최고의 신궁 남이. 유일한 피붙이인 누이 자인의 행복만을 바라며 살아간다. 어렵사리 맞이한 자인의 혼인날, 가장 행복한 순간에 청나라 정예부대(니루)의 습격으로 자인과 신랑 서군이 포로로 잡혀가고 만다. 남이는 아버지가 남겨준 활에 의지해 청군의 심장부로 거침없이 전진한다.

 

귀신과도 같은 솜씨로 청나라 정예부대(니루)를 하나 둘씩 처치하는 남이, 한 발 한 발 청군의 본거지로 접근해간다. 남이의 신묘한 활솜씨를 알아챈 청의 명장 쥬신타는 왕자 도르곤과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남이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날아오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곡사를 사용하는 남이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육량시를 사용하는 쥬신타,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사상 최대 활의 전쟁을 시작한다.

 

적의 심장을 뚫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운명을 건 사상 최대 활의 전쟁이 시작된다!

 

 

2011년 심장을 꿰뚫는 대한민국 최초 활 액션이 온다!

1초 적을 간파하는 시간
0.1초 화살을 겨누는 시간
0.01초 심장을 꿰뚫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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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제작비 90억! 2011년 여름 블록버스터의 최강자!


올 여름 블록버스터 영화 중 최강의 비기 <최종병기 활>. 총 제작비 90억 원이 투입된 대작은 비주얼부터 남다르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의상으로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청연> 등 다양한 작품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준 권유진 의상감독이 맡았다. 파란 비단에 금색 실로 섬세하게 수를 놓아 대륙의 왕자다운 화려함을 과시하는 도르곤의 전투복과 커다란 철제 징이 박힌 가죽 갑옷에 모피를 덧댄 쥬신타의 의상은 기존 전쟁 영화에서 보았던 의상과는 차원이 다른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당시 전 세계를 호령하던 만주족의 위엄과 위용을 살리기 위해 특별히 중국 소쩌우에서 제작했다.


그리고 산과 들을 넘나들며 벌이는 활 액션을 담기 위해서는 거의 모든 촬영이 야외에서 이뤄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풍광이 보일 수 있도록 최대한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어야 했던 탓에 서울의 아차산부터 전라도 완주까지 국토대장정을 방불케하는 촬영이 이어졌다. 넉 달 동안 스탭들이 이동한 거리만도 10,000km에 육박한다. 엔딩을 장식하는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는 천연기념물로 등록되어 있어서 태안군청, 국토해양부, 문화재청, 지역 환경단체와의 협의 끝에 한층 긴장감 넘치는 화면을 담을 수 있었다. 문경새재 제 1관문 역시 촬영이 불가한 곳이었으나,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촬영에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최종병기 활>의 막강한 비주얼을 완성 지은 것은 말이다. 기마민족인 청군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국내에서 촬영된 영화 중에서는 가장 많은 말들이 동원됐다. 그 수는 한 회 최다 80필, 총합 400필에 달한다. <최종병기 활>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규모와 비주얼을 앞세워 올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할 예정이다.

 

 

비극적 역사 뒤에 감춰진 영웅의 전쟁이 시작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13년 뒤,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쟁으로 기록되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한 나라의 국왕이 청나라의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더 이상 나라가 지켜줄 수 없는 백성들은 전리품이 되어 머나먼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나만갑의 ‘병자록’과 정약용의 ‘비어고’ 등의 기록에 따르면 그 수는 최소 50만. 이 짧은 기록에서 <최종병기 활>은 시작되었다. 한민족이 지닌 불굴의 정신을 담은 시리즈물을 만들고자 했던 김한민 감독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사건 속에 감춰진 영웅을 탄생시켰다. 인조반정 이후 모든 것을 잃고 죽은 듯 살아가다 병자호란으로 청의 포로가 된 누이를 구하기 위해 홀로 전쟁 속으로 뛰어든 신궁의 이야기는 어쩌면 역사가 담지 못했을 뿐 진짜 있었던 우리 민족의 이야기 일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역사 속에 스러져간 수많은 감춰진 영웅 중 하나를 스크린에 부활시켰다. 실제 역사적 사건이 배경인만큼 고증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김한민 감독은 당시의 상황이 나타난 각종 사료들은 물론, 청나라 군대를 재현하기 위해 역사에 충실한 중국 TV 드라마를 참고하기도 했다. 또한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활은 대한궁술원의 도움을 받았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의 자문을 얻어 당시 청나라의 언어였던 만주어를 재현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우리의 뼈아픈 역사에 감춰진 영웅의 또 다른 전쟁을 만들어 낸 <최종병기 활>은 사실적인 액션과 사극에 대한 이미지를 뒤엎는 스릴감으로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의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활약할 예정이다.

(다움 영화에서 펌)

 

 


 

기원전 480년. 스파르타의 중장보병 300명이 10만이 넘는 페르시아의 침략군과 테르미필레 협곡에서 맞서 싸운 이야기는 전설과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고전하던 페르시아군은 배신자를 통해 뒤로 돌아가는 샛길을 알아냈고, 결국 스파르타군을 앞뒤로 포위하고 화살을 퍼부어 전멸시켰다.

이때 페르시아군의 ‘최종 병기’가 활이었던 반면, 스파르타군에는 궁수가 단 1명도 없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스파르타가 활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보다 800년가량 앞선 시대를 그린 ‘일리어드’에서도 그리스 최고의 무장 아킬레스는 트로이의 파리스가 쏜 화살에 발뒤꿈치를 맞아 절명한다. 이 영향인지 기원전 5세기까지도 활은 ‘전사가 가져선 안 될 비겁한 무기’로 여겨졌다.

반면 활을 ‘민중의 무기’로 정의한 사람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는 저서 『전쟁의 역사』에서 영국 고유의 장궁(longbow)을 기사들의 무기인 석궁(crossbow)에 대조되는 농민들의 무기라고 설명했다. 로빈 후드의 무기인 이 장궁은 몇 차례의 개량을 거쳐 14세기 유럽 전장을 휩쓴 영국군의 최종 병기가 된다.

세월이 흐르면 병장기의 유행도 바뀌기 마련이지만 한국의 무기사(史)에서 활의 인기에는 시대 구분이 없었다. 고구려의 주몽,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 조선 태조 이성계 등 3개 주요 왕조의 시조가 명궁이란 공통점이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궁사뿐만 아니라 활 제작 기술 역시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신라 문무왕 때 구진천(仇珍川)은 1000보를 날아가는 강궁의 제작자였다. 당 고종의 부름을 받았지만 중한 벌을 내리겠다는 협박에도 끝내 고유의 활 제조법을 유출시키지 않았다.

병자호란을 무대로 한 사극 액션영화 ‘최종 병기 활’이 350만 관객을 동원하며 높은 완성도를 칭찬받고 있다. 오늘날에도 양궁 최강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인의 ‘활 DNA’를 생각하면 관객의 사랑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배경이 17세기 병자호란이라는 점은 좀 아쉽다. 이미 병자호란 때는 조선군의 방어체제가 성첩(城堞)과 화약무기 중심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32년 몽골 침입 때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해 침략군을 되돌려 보낸 승장(僧將) 김윤후의 시대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중앙일보 [분수대] - 최종병기
송원섭 jTBC 편성기획팀장

 

(음원제공 YouTube : George winston canon in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