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8. 14:30ㆍ♧- 사는 이야기 -♧/역사와 예술
발해에는 매춘이 없었다.
우리 인간의 직업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가 매춘이다. 이것은 남성 중심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언제나 매춘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매춘의 역사에도 예외가 없지 않다. 발해의 경우가 그렇다. 발해의 여권은 상당히 강했다고 한다.
일부일처제가 일찍이 확립되어, 발해의 남자들은 인근의 신라나 중국의 귀족과 일반인들도 많이 거느렸던 첩을 제대로 둘 수 없었다.
남송시대의 문헌인 <송막기문>을 보면 발해에서는 첩을 두었다 하더라도, 남편이 외출하면 부인들이 공모해 그 첩을 독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일부일처제가 확고해서인지 발해의 무덤에는 부부합장묘가 많다고 한다.
첩을 둘 수 없었던 발해의 남자는 또한, 바깥에 나가서도 딴짓을 할 수 없었다. 신라나 중국,거란이나 여진족에도 있었던 홍등가, 창녀등이 없었다. 더구나 발해가 계승한 고구려에서도 창녀의 일종인 유녀가 있었다.
중국 동북부 지방에는 '홍라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홍라녀'라는 발해 여인이 장군이 되어 거란과의 싸움에 나가 이긴뒤 남편을 구해 돌아왔다는 전설이다. 집안에서만 강한 게 아니라 실제 전투를 수행할 정도로 씩씩한 발해의 여성이었다. 그래서인지 발해에서는 절을 할때도 남자는 무릎을 꿇고 하는데, 여자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우리 역사에서 여권이 가장 강력했던 나라로 발해를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중에서-
성경에서 보는 매춘의 역사
축첩제도는 욕심과 편의를 따라 남자들이 만들어낸 제도이다. 인류역사를 통털어 축첩제도는 라멕 전과 라멕 이후로 나눠진다.
창세기 4장 19절부터 등장하는 라멕은 자신을 위하여 두 아내를 얻었다. 거기서부터 남자들의 오랜 축첩제도와 크고 작은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부다처제를 지지하고 원하셨다면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라는 오로지 일남일녀의 인간만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선 처음부터 잘 알고 계셨다.
첩으로 인해 가정과 국가가 분열되고 나라가 시끄러워 질것을.
욕심과 편의를 따라 신의 뜻을 거역하고 인간인 남자들이 만들어낸 축첩제도때문에 역사상 얼마나 많은 싸움이 있어 왔던가.
식욕보다 성욕을 우선시하는 남자들의 특성은 '열 계집 마다하지 않는다.'는 옛말 하나로 충분히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금까지 역사는 항시 남성 중심의 역사였다. 남성중심의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내는 산물이 바로 매춘부와 축첩제도이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여러 첩을 거느렸던 지도자의 나라는 그만큼 전쟁이 많았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100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줄 테니 조용히 기다려라."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한 체 자식이 없어 초조하고 불안한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사라의 여종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음으로써 오늘날 중동지역의 분쟁은 끊임이 없기에 이리도 분쟁의 역사가 깊고도 유구한 것이다.
아름다운 소리 난정뜨락 - 파란나비님의 글중에서
발해의 실제 영토 - 한국 역사책은 왜 수정하지 않는가?
2007년도에 이미 신문기사에서 기존의 우매한 국사학자들이 엉터리로 그려 놓은 발해영토에서도 한참 북쪽에서 발해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주변지역 지표조사 결과 고구려의 전통을 잇고 있는 발해 석실분이 발견됐으며, 행정치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성이 여럿 분포하고 있음도 확인했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문화재연구소 홍형우 학예사는 “이번 발굴 결과를 통해 아무르 지역과 발해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며 발해 무왕과 선왕대에 흑수말갈의 영역을 포함해 주변으로 영토를 확장했다는 문헌 기록과 아무르주의 제야강 유역까지 발해 영역으로 보는 북한과 러시아 학계의 견해와 부합된다”고 설명했다.
송민섭 기자
그러면 한시라도 빨리 연구하고 수정보완하여 국사책을 보완해야 할텐데 한국의 정치가들과 역사학자들은 태만하고 무지하여 지금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다 뭐다 하여 옛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송두리째 지워버리고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9년에 고구려 유민 발해 시황제인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사실 대진국이라고 나라이름을 정했는데 당이 폄하하는 의미로 발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도 식민사관에 젖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발해지도를 형편없이 축소하여 그리고 있다. 요녕성은 아예 빼고 길림성과 북한, 그리고 흑룡강성 절반과 연해주가 다이다. 도대체 중국과 일본은 지금도 자신들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고 또한, 영토침범의 야욕을 숨기지않고 있는 판에 한국은 그나마도 자랑스런 선조들의 역사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니 지하의 선조들이 땅을 치며 통탄할 일이다. 이것이 대한미국의 슬픈 현실이다.
고토수복과 역사회복 - history author 님의 글중에서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길림성의 발해는 잘못되었다.
발해의 중심부는 북경 동북부 즉 고구려의 평양성이 발해의 중경현덕부이다.
고조선과 부여의 海口지경{고구리(고구려) 후기엔 海庄지경}에 애초에 축성되었고 고구리가 기둥에 금을 입혀서 평양대궁으로 증개축하였던 바로 그 평양성을 대진{발해} 세력의 중심부로 하였던것이 진역사이다.
결국 安市城안시성은 安次(Anci)였고, 보지(보저)宝坁(寶坻)가 평양성平壤城이었다는 추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내외 2중의 천연 해자수로가 있고 하수처리를 할 물줄기마저 조패하潮白河{조하潮河,패하白河} 하류로 처리할 수 있는 천연의 도읍지로 손색이 없음이다. 물론 인근에 큰 사찰도 있고 신라가 만들어바쳤을 다리를 지키는 석교진石橋鎭도 바로 있고, BC13세기 이후 물속에 잠길 일이 없던 海口 海城의 터이었다. 고구리 평양성에 대한 각종의 지리 설명은 우거의 평양과 번조선의 평양 및 고구리 평양에 대한 것들이 이리저리 편집 왜곡되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 心濟님과 청송님의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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