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들의 생일 잔치

2012. 10. 18. 14:30♧- 사는 이야기 -♧/역사와 예술

지난 1월 8일은 김정일(金正日)의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은(金正恩)의 생일이었다. 그의 생일을 앞두고 공휴일로 지정되거나 대대적인 생일 행사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의외로 그의 생일은 조용히 넘어갔다. 만일 김정은의 생일까지 공휴일로 지정된다면(언젠가는 생일로 지정되겠지만), 김일성(金日成)부터 3대에 걸쳐 최고지도자의 생일이 최대 국경일로 지정되는 것이 된다. 봉건 세습왕조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2011년 새해를 맞아 북한 외국문출판사는 김정일의 생일(2월16일)을 붉은색으로 굵게 표시하고, 상단에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탄생하시였다’고 적은 달력을 발행했다. 이전부터 북한은 김일성(1962년 지정)과 김정일(1982년 지정)의 생일을 국가공휴일로 지정, 매년 성대한 행사를 치러 왔다.
 

1982년부터 2005년까지 24년 동안 재위(在位)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빈 압둘 아지즈(Fahd Bin Abdul Aziz) 국왕. 그는 2002년 81세 생일을 맞아 3개월 동안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면서 한화(韓貨)로 600억원 상당의 돈을 썼다. 가족과 친지, 의료진, 경호원 등 300여 명을 실어 나르기 위해 6대의 제트기가 동원됐다. 일행은 제네바의 부촌(富村)으로 이름난 콜롱주 벨리브의 호화 빌라 10채와 500개의 고급 호텔을 장기(長期) 임차(賃借)했다. 2006년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군주 및 독재자의 재산’에 따르면, 당시 압둘 아지즈의 재산은 210억 달러(당시 한화 약 19조7300억원)로 793명 중 최고 부자였다. 이것은 당시 사우디 국내총생산(GDP)의 45%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1973년부터 1990년까지 17년간 철권통치를 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Jose Ramon Pinochet Ugarte) 전 칠레 대통령은 1995년 11월 25일 80회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치렀다. 이 생일잔치에는 2000여 명이 참석했다.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1989년 국민투표에서 패한 후 대통령직에서는 물러났지만, 군(軍)총사령관으로 막후의 실력자였다. 그가 80회 생일장치를 성대하게 치른 것은 여전히 자신이 칠레의 실력자임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1986년 민중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지에서 죽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Edralin Marcos) 필리핀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는 1999년 70세 생일에 마닐라호텔의 연회장 2개를 빌리고 외국인들까지 초청해 다음날 아침까지 요란한 파티를 열었다. 그는 2009년 80세 생일에는 마닐라에서 약 1000명의 손님이 참석한 가운데 수많은 장미꽃과 거대한 생일케이크에 둘러싸여 파티를 벌였다. 생일축하 불꽃놀이도 했다. 마르코스의 가족들은 생전에 그가 좋아했던 행운의 숫자 7과 겹치는 7월 7일에 그의 치적을 기리는 책 7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소연방에 속해 있던 시절부터 21년간 투르크메니스탄을 통치했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Saparmurat Niyazov)는 김일성 부자 못지않은 우상화 놀음으로 악명 높았다. 그는 자신을 ‘투르크멘바시(Turkmenbashi·‘투르크멘인의 아버지’라는 의미)’라고 부르게 하고, 자신을 찬양하는 내용의 교과서를 모든 학생에게 암기하도록 했다. 자신의 생일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생일이 속한 9월을 아예 ‘투르크멘바시’로 바꿨다. 2002년부터는 자신의 부모 생일이 속한 4월과 5월을 각각 부모의 이름으로 변경했다. 그는 자신의 황금동상을 세우고 동상이 태양을 등지는 일이 없도록 태양을 따라 회전하게 설계했다. 주민들이 독서를 하지 않는다며 지방 도서관 폐쇄명령을 내리는 등 황당한 명령을 남발해 ‘엽기적 독재자’로 불렸던 그는 지난 200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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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간 루마니아를 통치했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는 자신의 생일은 물론 아내 엘레나의 생일까지 국경일로 지정했다. 1978년 차우셰스쿠의 60회 생일 때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664페이지에 달하는 호화판 장식용 책 ≪경의를 표합니다≫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차우셰스쿠를 다정다감한 가장(家長)이자, 영도력 있는 지도자, 창조적인 사상가라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2008년 군주제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네팔에서는 전통적으로 국왕을 신성시해 왔다. 국왕의 생일은 공휴일이었고, 의장대 사열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며칠에 걸쳐 행해졌다. 생일을 전후해 왕궁 앞에는 국왕을 알현하려는 수천 명의 국민이 장사진을 이뤘다. 네팔에서 국왕은 힌두교에서 ‘유지(維持)의 신(神)’인 비슈누 신의 환생(還生)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폭정(暴政)을 폈던 갸넨드라 국왕이 민중혁명으로 실권(失權)한 2006년부터는 국왕의 생일행사가 폐지됐다.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에 이어 2007년부터 투르크메니스탄을 통치 중인 구르반굴리 무함메도프(Gurbanguly Myalikgulyyevich Berdymukhammedov)는 2007년 50세 생일에 굵직한 금(金)사슬과 다이아몬드 등 각종 보석들로 꾸며진 1kg짜리 목걸이와 생일축하금 2만 달러(약 2200만원)를 받았다. 이와 함께 자신의 연금(年金)과 봉급도 30% 인상했다.
  
1981년부터 권좌를 지켜 온 호스니 무바라크(Muhammad Hosni Mub arak)의 생일에는 언론의 아첨이 줄을 잇는다. 1994년 그의 66세 생일을 맞아 이집트 신문들은 무바라크를 ‘이집트인의 국부(國父)’라고 추앙하면서 그의 통치하에 국민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됐다고 보도했다. 또한 반(半)관영인 ≪알 아흐람≫, ≪알 곰후리야≫지(紙)는 “무라바크 덕분에 민주주의가 발전되었다”면서 “그의 업적은 꺼지지 않는 태양처럼 길이 빛날 것”이라고 찬양했다. 2005년 그의 77세 생일에 관제매체들은 “당신의 태양은 오늘 더욱 빛난다”고 아부했다. 같은 날 카이로에서는 3000여 명의 시위대가 독재반대를 요구하며 2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1980년 집권한 짐바브웨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 대통령의 생일은 1986년부터 국가적인 축제로 치러진다. 2007년에는 2만명을 축구경기장에 초청해 생일잔치를 했다. 이 생일잔치는 생방송으로 방송됐다.
  
2008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접경 도시인 베이트리지에서 수천 명의 지지자가 참석한 가운데 생일잔치를 했다. 이날 행사를 위해 3조 짐바브웨달러(25만 달러, 한화로 약 2억4000만원)가 지출됐다. 이날 생일 행사장에서 2~3km 떨어진 남아공 국경에서는 무가베에 반대하는 망명자 200여 명이 “이제 당신의 케이크를 다 먹었다. 그러니 꺼져라”라는 글귀가 적힌 대형 풍선을 띄우고 반(反)무가베 시위를 벌였다.
  
2009년에는 그의 85번째 생일을 맞아 기념연회와 갈라쇼가 1주일간 진행됐다. 영국의 ≪더 타임스≫ 인터넷판은 무가베의 85회 생일잔치를 위해 짐바브웨 정부가 기업들을 상대로 생일 축하 기부금과 기증품을 거의 강제적으로 갹출했다고 보도했다. 정부가 요청한 기증희망 목록에는 샴페인 2000병(모엣 샹동이나 볼링제), 위스키 500병(조니워커 블루, 시바스리갈 21년산), 바닷가재 8000마리, 참새우 100㎏, 캐비아 4000인분, 페레로 로쉐 초콜릿 8000상자, 오리 3000마리, 케이크 3000개, 치즈 500㎏, 달걀 1만6000개 등이 포함돼 있다. 현금을 낼 경우에는 4만5000∼5만5000달러(약 5000만~6000만원)를 무가베의 생일잔치 준비 조직위원회 명의의 은행계좌에 입금하도록 했다. “생일 후원을 거절한 기업은 평생 기업활동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압력도 가해졌다.
  
수천 명이 참석한 그의 생일잔치에는 철갑상어알, 바닷가재 등 최고급 요리와 프랑스산 샴페인 등이 올랐다. 그의 나이를 상징하는 85kg짜리 초대형 케이크도 준비됐다. 당시 파티를 위해 수십 마리의 동물이 도축됐다.
  
짐바브웨는 현재 국민의 90%가 실직(失職) 상태에 놓여 있으며, 지난 수년 동안에는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만%에 달했다. 식량과 연료 부족으로 700만명에 달하는 국민이 국제적 식량지원에 의존해 연명해 가고 있다. 평균 수명은 남성 37세, 여성 34세에 불과하다. 2008년에는 콜레라로 3900여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아랑곳 않은 채 무가베는 작년의 86번째 생일잔치도 요란하게 치렀다. 그는 불라와요시(市)에서 국내외 유명 가수들을 대거 초청,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12시간 동안 ‘올 나잇 생일경축파티’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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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쿠바혁명 이후 권좌를 지켜 온 피델 카스트로(Fidel Alejandro Castro Ruz)는 2006년 80세 생일을 병상(病床)에서 맞았다. 당시 그는 장출혈(腸出血)로 인해 권력을 임시로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이양하고 요양 중이었다. 그의 생일축하 행사는 카스트로의 생일이 아닌 공산혁명기념일에 쿠바 전역에서 치러졌다. 수도 아바나에서는 공산주의청년연맹이 주최한 ‘반제국주의 법정’이라는 생일축하 기념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콘서트에는 80여 명의 음악인들이 참여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공산당 깃발을 흔들며 “돌아와요, 카스트로”라고 외쳤다. 이 콘서트를 시작으로 남미(南美) 지식인들이 참석해 카스트로의 업적을 토론하는 포럼 등 다양한 생일축하 행사가 5일간 이어졌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니카라과의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가 등 80개국에서 온 1500여 명의 손님이 참석한 가운데 12월 2일에 열렸다. 이날 쿠바 주재 북한 대사는 “카스트로 의장(국가평의회 의장)이 북한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싸움을 적극 지원해준 데 감사를 표한다”며 감사패를 선물했다.
  
카스트로가 공식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2008년, 그의 82세 생일 때에는 정부 차원의 공식행사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쿠바의 민속종교인 산테리아(Santeria) 성직자들은 그의 생일을 맞아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들은 피델 카스트로가 장출혈로 쓰러졌을 때도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지냈으며, “당시 제사의 효험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2009년 83세 생일에는 쿠바 아바나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사진전이 열렸고, 2010년 84세 생일에는 카스트로의 자서전이 출간됐다.
  
카스트로의 생일은 쿠바의 공식 휴일로 지정돼 있지는 않지만, 관영 매체와 여러 단체들은 아직도 그의 생일 축하를 위해 열심이다. 그의 84세 생일에 쿠바공산당 기관지 ≪그란마≫는 출생지 비란 마을 특집기사를 다루기도 했다. 그의 생일을 하루 앞둔 8월 12일부터는 쿠바 각지에서 ‘피델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200명의 어린이 합창단이 생일 축하 공연에 나선다. 카스트로의 모교인 아바나 대학에서도 기념콘서트가 열리는 등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연일 이어진다. 카스트로 동생의 집권이 계속되는 한 이런 ‘소란’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月刊朝鮮 2011년 2월호 閔庚玉 인턴기자의 글에서 가져왔습니다.


꽃도 반쯤 피었을 때가 제일이요
배도 돛을 반쯤 당기면 최고
말고삐도 반쯤 당기면 가장 좋은 것
돈도 너무 많으면 걱정, 너무 없으면 고생스럽고
인생이란 반은 달콤하고 반은 쓴 것
반반씩 섞인 맛이 가장 제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