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곤 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라는 이야기는 현실 속에서 쉽사리 벌어지지 않는 일이 발생했거나 아름답고 환상적이 일이 일어났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영화란 원래 현실의 일을 극적인 장면으로 시각화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멋지고 아름답고 환상적인 장면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잊혀진다. 그래서 영화는 적절하게 음악을 사용한다. 아름다운 장면과 음악이 조화를 이루면 쉽게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강렬한 장면과 기억에 각인된 선율은 영원히 살아 있다고 얘기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은 영상의 역할이지만 결국 관객의 눈물을 떨구게 하는 것은 음악의 힘"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래서 기억에 남은 영화의 한 장면과 '그 장면에 흐르던 음악'을 소개해 본다. "여러분은 영화의 명장면을 기억할 때 떠오르는 음악이 없으신가요?"
* 졸업(The Graduate, 1967)
감독 : 마이크 니콜스 (Mike Nichols) 출연 : 앤 밴크로프트(Anne Bancroft, 로빈슨 부인 역),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 벤자민 브래드독 역)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의 손에 아카데미 감독상을 쥐어준 영화 [졸업(The Graduate]의 마지막 장면. 이 영화로 처음 주연배우가 된 더스틴 호프먼(Dustin Hoffman)이 결혼식장에서 신부 드레스를 입은 엘레인의 손목을 이끌고 나와 버스에 오른다. 카메라는 아무 말 없이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주인공의 얼굴을 한참 동안 비춰줄 뿐이다.
풍경은 뒤로 멀어진다. 사랑을 찾아왔지만 정해지지 않은 앞날, 과거와의 결별과 알 수 없는 세계의 모호함과 불안을 이 조용한 롱-테이크가 표현한다. 그리고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가 흐르자 침묵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원)
(음원제공 YouTube : Sound Of Silence - Simon & Garfunkel)
* 카사블랑카(Casablanca, 1942)
감독 : 마이클 커티즈 (Michael Curtiz) 출연 :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 릭 블레인역),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일사 런드역)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라고 쓰려다가 주춤한다. 그나저나 요즘 젊은 영화 팬들도 [카사블랑카(Casablanca)]를 기억하고 있을까,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은 "고전이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고, 그건 영화나 음악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므로 혹시라도 여기 언급한 장면을 보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일단 시청을 권한다.
"샘, 그 노래를 들려줘요(Play it, Sam)."라는 불멸의 대사에 이어지는 노래 'As Time Goes By'. 음악이 매개하는 일자 룬드(잉그리드 버그만)와 릭 블레인(험프리 보가트)의 재회 장면은 요즘 영화의 직설적인 방법이 결여한 은근하고 내밀한 긴장감이 팽팽하다. 그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아우라다. (박은석)
(음원제공 YouTube : As Time Goes By - Dooley Wilson)
*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1977)
감독 : 존 바담(John Badham) 출연 : 존 트라볼타(John Travolta, 토니 마네로역)
영화가 시작되고 배우의 이름과 영화의 제목이 자막에 떠오르는 순간, 번쩍이는 구두와 펄럭이는 바짓단으로 거리를 쓸듯 경쾌하게 내닫는 발걸음이 클로즈업된다. 페인트 통을 배달하는 와중에도 잔뜩 멋을 낸 청년 토니 마네로(존 트래볼타). 쇼윈도를 기웃거리고 아가씨들을 힐끔거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그의 모습 뒤로 'Stayin' Alive'가 흐른다.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저 유명한 오프닝 시퀀스는 극히 단순한 육체의 리듬만으로 관객들에게 춤의 본질과 음악의 본분을 강렬하게 전시하는데 성공했다. 보고만 있어서 온몸이 들썩거리는 느낌. 당시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디스코에 열광했었는지를 이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거기 있다. (박은석)
(음원제공 YouTube : Bee Gees - Stayin' Alive)
* 터미네이터 2 (Terminator 2: Judgment Day, 1991)
감독 : 제임스 캐머런(James Cameron)
출연 : 아놀드 슈왈제네거 (Arnold Schwarzenegger, 터미네이터 역)
길거리를 방황하는 존 코너와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길거리를 달려 나간다. 앞머리를 내리뜨린 반항아의 배경음악은 커다란 이동식 카세트 데크에서 흘러나오는 'You Could Be Mine'이다.
건스 앤 로지스(Guns'n Roses)의 이지(Izzy Stradlin)가 만든 곡은 이 거친 아이들을 매혹시키기 충분할만큼 날렵한 기타 리프와 베이스의 육중함 사이의 조화가 관건이다. 두툼함과 날카로움의 미학을 겸비한 노래는 존 코너와 T2 콤비의 조합을 음악적으로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조일동)
(음원제공 YouTube : Guns N' Roses-You Could Be Mine)
* 펄프 픽션(Pulp Fiction, 1994)
감독 : 쿠엔틴 타란티노 (Quentin Tarantino) 출연 : 존 트라볼타(John Travolta, 빈센트 베가역), 우마 서먼(Uma Thurman, 미아 웰러스역)
커다란 릴데크로부터 흘러나오는 음악에 제멋대로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는 보스의 부인(우마 서먼)과 화장실에서 자신의 임무를 되뇌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보스의 심복(존 트래볼타). 어즈 오버킬의 노래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에로틱한 긴장과 코믹한 갈등이 파국의 시너지를 향해 줄달음 치는 장면의 메타포와 아이러니를 응축한 폭풍 전의 고요와도 같다.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의 히트곡을 커버한 이 노래는 레몬헤즈(Lemonheads)의 'Mrs. Robinson', 소울 어사일럼(Soul Asylum)의 'To Sir with Love', 카펜터스 트리뷰트 앨범 [If I Were a Carpenter]와 함께 당대의 작은 트렌드 - 쿨한 젊은 밴드들이 전혀 쿨해 보이지 않는 옛날 팝송을 리메이크하던 경향을 상징함으로써 [펄프 픽션(Pulp Fiction)]이라는 제목의 본래 의미에 값한다. (박은석)
(음원제공 YouTube : Urge Overkill - Girl You'll Be a Woman Soon)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 2000)
감독 : 스티븐 프리어스(Stephen Frears)
출연 : 존 쿠삭(John Cusack, 롭 고든 역), 잭 블랙(Jack Black, 베리 역), 리자 보넷(Lisa Bonet, 마리 드샐 역)
레코드숍을 운영하는 존 쿠색은 “지금부터 베타 밴드를 틀어서 다섯 장 팔겠어”라 공언하고 ‘Dry the Rain’을 재생한다. 감상자라고는 달랑 종업원 두 명, 그것도 손님도 없는 주제에 손님을 가려 받기까지 하는 성미 고약한 영업장에서 노래는 유유히 흐른다.
마케팅이라 말하기도 참 민망한, 때로는 까다롭게 그러나 무한하게 음악을 사랑하는 자만이 내놓을 수 있을 법한 무모한 전략으로 보이지만 성과는 있었다. 바로 내가 낚였다. (이민희)
(음원제공 YouTube : The Beta Band - Dry The Rain)
* 록키 III (Rocky III, 1982)
감독 :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출연 :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록키 발보아 역), 탈리아 샤이어(Talia Shire, 에드리안 역)
자만심에 빠진 챔피언 록키와 거친 도전자 랭의 결전을 극적으로 표현한 록 넘버. 서바이버의 긴장감 넘치는 기타 백킹과 인트로는 30년이 지났지만 링 위에 오르는 선수의 아드레날린을 상승시키기에 충분하다. 음악이야말로 늘어지는 할리우드식 영웅주의 시리즈물을 인간승리 드라마로 만든 일등공신 중 하나이다. (김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