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24. 22:30ㆍ♧- 사는 이야기 -♧/영화와 사진
무겁다.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가슴을 짓누르는듯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이 비약적인 경제 발전 속에 온전한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피폐하고 왜곡된 폐해를 송두리째 뒤집어쓴 소외된 저소득층의 괴로운 현실에 대한 연민이었든 아니면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악의 본질에 대한 두려움과 본능적인 거부감이 되었든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도도히 흐르는 불편하고 왠지 가슴을 후벼 파는듯한 괴로운 느낌의 단상이 뇌리에서 영 가시지 않는다.
과연 김기덕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을까?
인간의 악은 어쩌면 본질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 물론 오래전부터 동양 철학에서는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여 크게 두 가지 상반된 이론으로 인간의 심성을 논해 왔다. 물론 두 가지 이론이 다 맞을 수도 있고 또 틀릴 수도 있다. 어쩌면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혼재된 품성이 제각각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악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논쟁의 대상 속에서 단지 추상적으로 논하는 악의 허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옥죄고 부딪히는 인간이 지닌 악의 실체를 어디까지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 또 세상에 범람한 악의 근원과 의미는 무엇인지 짚어 볼 수 있어야 영화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보지 않을까 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실체를 알 수 없는 핏덩이가 흥건하고 휠체어에 앉은 한 젊은이가 스스로 자살하며 고리대금 업자의 하수인인 주인공 강도의 포학하고 몰인정한 행태가 전면에 드러난다.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가족과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경제적인 압박으로 사채를 쓰고 살인적인 고리를 감당하지 못해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평범하고 선량한 이 시대의 서민들이다.
주인공 강도에게 시달리고 피해를 보는 다수 서민들은 선량하다. 근본적으로 빌려 쓴 사채를 갚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워낙 원금의 몇 배나 많은 강퍅한 고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경제적인 여건이 불리해 다만 상환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도의 인정사정없는 폭력에도 악을 악으로 갚지 못한 채 그에게 한순간도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현실에 절망할 뿐이었다.
현실에서 일부 소수 국가와 기업들이 세상의 부를 온통 독점하면서도 대다수 서민은 개발이익을 돌려받지 못하고 빈약한 나머지의 자본을 그 가운데서 서로 나누고 지금도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전 세계의 약 18억 명이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수입으로 극도의 비참한 빈곤 속에서 시달리고 5초마다 10살 미만의 어린이들이 먹지 못하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한다. 이런 왜곡된 현실 속에서 삶은 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런 토양 아래 악은 사회에 기생하고 뿌리내릴 수밖에 없으며 또한 작은 악은 더 큰 악의 손아귀에 휘둘리고 있다.
이런 냉엄한 현실 속에서 어느 날 강도는 강도에게 찾아와서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인에게 자신도 답답한 듯 '돈'이란 무엇인가 물어본다.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돈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마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을 이루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듯한 이 말이 김기덕 감독은 현실 속의 삶을 왠지 더욱 심각하고 처절하도록 우리에게 느끼게 하고 있는 것 같다.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잠겨 있는 모습을 묘사한 미술양식이라고 한다. 피에타에 드러난 성모 마리아의 감정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수없이 겪는 상실의 고통에 은유 되어왔다.
피붙이 없이 자란 강도에게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갑작스레 강도 앞에 나타난다.
강도는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인을 처음에는 격렬하게 거부한다. 강도는 여태 전혀 들은바 없는 엄마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현실 속에서 이제는 엄마가 거추장스러운 존재인지도 몰랐다. 비정하고 냉혹하게 악을 집행하여야 할 자신이 가족이라는 의미를 일깨워주는 사랑스러운 엄마라는 존재를 내면에서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강도는 자신을 참혹한 현실로 내팽개쳐 버리고 지금까지 고아로 외롭게 자라게 한 엄마에 대한 원망도 깊었을 것이다. 강도는 엄마라는 여인에 반발하다 끔찍하게도 근친상간의 악행까지 저지르고 만다.
인간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식욕과 성욕과 재물 욕이 있다. 이런 욕망 자체야 원래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 다만 그런 욕구를 실행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심이 자신을 스스로 힘들게 하고 다른 대상에게 범죄를 저지르며 죄악에 이르게 할 뿐이다.
과연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이런 욕망은 인간의 원죄에 속하는 것인가?
인간이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현실 사회에서 제각각 불순하게 드러냈을 때 상대방의 반발과 자신이 처한 사회의 제재를 받는다. 또한, 사회에서 용납받지 못한 악행은 본인의 반성과는 별개로 어떤 응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누구라도 잠재하는 원초적인 욕구와 저질러진 악행은 결국 용서받을 수 없는가가 관건이다.
그처럼 냉혹하고 비열하던 강도도 결국 자신에게 다가온 엄마의 존재 앞에서 흔들리고 그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을 후회하게 되고 반성하게 된다. 그러나 엄마라는 존재는 강도의 친엄마가 아니라 다만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의 피해자 엄마로서 자신에게 복수하러 나타난 인물이었을 뿐이었다.
악행의 대명사격인 강도에게도 자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가족이 희생당하는 처절함을 맛보이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그 처절한 기억과 회한 속에서 강도가 무참하게 망가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회개(悔改)란 뉘우칠 회와 고칠 개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한다. 따라서 뉘우침만 있어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고 반드시 반성하고 달라진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회개하고 변화된 모습의 진정성을 보여준다면 예전에 저질렀던 커다란 악행도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는 있는 것일까? 이것이 진정한 구원의 참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엄마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한 채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하던 강도가 회개하는 심정으로 강도에게 피해를 보고 불구가 되어버린 피해자의 부인이 생활을 책임지려, 뻥튀기 장사를 하던 차의 꽁무니에 매달려 자살을 꾀하는 것으로 그 막을 내린다. 그 사실도 모르고 피해자의 부인은 새벽길을 차로 달린다.
김기덕 감독의 진가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이 마지막 장면에서 발휘되었다고 믿는다.
결국,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자신의 삶에 있어서 현실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폭력적인 악을 이기는 응징이고 복수요 진정한 삶의 구원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려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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