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가슴에도 따스하고 행복한 봄은 오는가

2013. 2. 18. 09:10♧- 사는 이야기 -♧/삶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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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시로 유명한 T. S. 엘리어트는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4월은 아니지만 2월의 LA 곳곳에는 봄을 재촉하듯 속칭 캘리포니아 라일락이 길가에 활짝 피었다. 드러난 푸른 잎새에 길고 하얀 꽃망울이 눈부시도록 곱다. 한국에서는 엘리어트의 시처럼 길고 긴 겨울을 참고 견뎌낸 라일락이 아름다운 향을 뿜어내며 화려한 봄을 알리는 꽃의 대명사이지만 이곳의 라일락은 향도 진하지 않고 모양도 약간 다르다.
     
그래도 길가에 핀 하얀 라일락 꽃은 곧이어 피어날 보랏빛 자카란다와 더불어서 LA를 채색하고 LA의 봄을 알리는 전령과도 같다. 해가 늬엿늬엿 지는 어느 한적한 길을 가다 활짝 핀 라일락 꽃을 바라보면 어느덧 포근해지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게 된다.
 
 
 
 
 
 
시리고 추운 겨울은 갔다. 매서운 북풍 찬바람에 어깨를 움츠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땅바닥만을 바라보던 시기는 지나가고 따사한 햇볕에 어깨를 펴고 흰 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날이 돌아온 것이다.
 
저절로 마음은 들뜨고 넓고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벌판으로 달려가고 싶다. 이상화 시인의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는 비록 다른 의미이지만 봄을 맞이하는 들뜬 마음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자연의 신비함은 이처럼 놀랍다. 춥고 긴 겨울은 가고 시간은 흘러 봄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터지고 생채기 난 무거운 가슴을 덮어주듯 따사한 봄은 싱긋 웃으며 모두를 자애롭게 달래주며 이렇게 말한다. " 자! 봄이 왔다. 가슴에 희망을 품고 저 넓은 들판으로 맘껏 달려라. 좁디좁은 구석에서 싸우지 말고 높디높은 하늘로 맘껏 날아라. 훨훨!"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에는 힘들고 고통스럽던 상황에서 모두의 가슴에 상처 하나씩 훈장처럼 달렸으리라. 삶에서 견디기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덮어지고 때맞춰 돌아오는 봄처럼 이겨낼 수 있다.

 

따사한 봄날에 아름답게 활짝 핀 꽃을 바라보며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인내의 숭고함과 앞날을 개척하는 보람찬 희망을 품으며 처절하게 빼앗긴 모두의 가슴에도 진정 따스하고 행복한 봄은 오는가! 믿고 싶다. 아니 믿는다. 또한, 오늘도 꿈꾼다. 봄날의 살랑이는 바람처럼 사랑의 달콤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