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시민으로 되돌아간 미테랑 대통령
2012. 10. 21. 08:13ㆍ♧- 사는 이야기 -♧/삶을 말하다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문제로 시끄럽다. 편법 증여와 특혜 문제가 걸리고 개발차익 논란까지 불거지고 있다. 결국, 내곡동 사저는 포기하고 사저 문제 책임자인 경호처장은 사임하게 되었다. 애초에 경호 시설을 짓는데 땅값과 건축비 포함해서 100억 원의 경비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법적 공정성은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국민과의 정서적 공감은 제로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사저를 '아방궁'이라고 비판했던 전력이 있는데 이제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왜 이렇게 한국의 대통령들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말들이 많은가. 한국의 치안이 불안정하여 경호시설과 경호원들의 필요성이 증대되는지, 아니면 대통령도 한 사람의 가장이기에 자식들의 앞날을 염려하고 설계하기 위함인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하고 임기가 끝나면 시민으로 조용히 돌아가 시민과 어울려 대화하고 소통하며 남은 생을 충실히 보내는 지도자의 상을 한국에서는 아직 기대하기가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마침 프랑스의 미테랑이 대통령이 된 지 30주년을 기념하여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그의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1995년 5월 17일 오전 대통령 전용차인 검은색 르노 한 대가 엘리제궁을 미끄러져 나왔다. 전용차는 경찰 모터사이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포부르 생토노레 길을 지나 루아얄 길로 우회전한 뒤 콩코드 광장에 접어들었다. 이윽고 콩코드 다리 앞에 이르자 전용차가 멈춰 섰다. 뒷문이 열리고 구부정한 어깨에 늙수그레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이젠 전임자가 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었다.
미테랑은 몇 발자국을 걸어 다리 앞에 주차돼 있던 소형 르노 생크로 옮겨 탔다. 마티즈 정도 크기의 이 차는 프랑스 사회당이 14년 동안 프랑스를 이끈 미테랑에게 감사하며 외출할 때 타라고 선물한 것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아들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형차는 센 강을 건너 파리 7구로 향했다. 막 퇴임식을 마친 전직 대통령을 태운 차는 사저인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몇 차례나 교통신호에 걸려 멈춰서야 했다. 프랑스 최장수 대통령으로서 공정하고 통합된 프랑스를 일궈낸 미테랑은 그렇게 평범한 시민으로 되돌아갔다.
미테랑은 몇 발자국을 걸어 다리 앞에 주차돼 있던 소형 르노 생크로 옮겨 탔다. 마티즈 정도 크기의 이 차는 프랑스 사회당이 14년 동안 프랑스를 이끈 미테랑에게 감사하며 외출할 때 타라고 선물한 것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아들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형차는 센 강을 건너 파리 7구로 향했다. 막 퇴임식을 마친 전직 대통령을 태운 차는 사저인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몇 차례나 교통신호에 걸려 멈춰서야 했다. 프랑스 최장수 대통령으로서 공정하고 통합된 프랑스를 일궈낸 미테랑은 그렇게 평범한 시민으로 되돌아갔다.
[분수대 - 이훈범(j에디터)]
미테랑은 누구?
미테랑((Franç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1916년 10월 26일 - 1996년 1월 8일)은 2차례(1981~95)에 걸쳐 프랑스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프랑스와 서유럽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추진했다. 사회당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직에 올랐으나, 재임 초기에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채택했다.
역장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보병에 입대, 1940년 부상을 입고 독일군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해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1947년 하원에 진출한 미테랑은 이듬해 제4공화국의 폴 라마디에 연립내각에서 각료가 되었다. 그후 12년 동안 제4공화국 정부에서 다양한 각료직을 거쳤다.
미테랑은 1971년 사회당 제1서기로 선출되었으며 1974년 대통령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1981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을 물리쳤다. 미테랑은 재임기간 동안 금융과 주요 산업체에 대한 국유화를 단행했으며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사회보장의 혜택을 확대했다. 외교에 있어서는 소련에 상대적으로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는 반면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썼다. 미테랑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은 인플레이션의 심화와 기타 문제들을 야기했던 까닭에 1983년부터는 정부 지출을 삭감하기 시작했고, 첫 임기가 끝날 무렵 프랑스 사회당은 사실상 자유시장경제체제로 돌아섰다.
1986년 총선 결과 우익이 다수 의석을 점유하자 미테랑은 자크 시라크 를 총리로 영입하게 되었다. 역사상 유례가 드문 권력분담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미테랑은 대통령으로서 외교를 담당했다. 미테랑은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여유 있는 표차로 시라크를 압도하고 당내 온건파인 미셸 로카르 를 총리로 기용해 집권 제2기를 맞게 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유럽 통합을 촉진하고 프랑스 경제에 대한 독일의 비교우위에서 벗어나고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사회당은 1993년 총선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곤란을 겪었고, 미테랑은 집권 제2기의 마지막 2년을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하의 중도우파와 이른바 '동거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시련을 겪었다. 1995년 전립선암이 악화되어 임기 말년에 사임했다. 그는 프랑스 대통령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미테랑에 관한 일화
1. 프랑스의 우파 단체가 유태인 묘지를 파헤쳐 손상시켰을 당시에 부당하다며 프랑스 전역에 좌파 중심의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때 미테랑 대통령이 아무 예고도 없이 파리의 시위대 안에 섞여 있었다. 그를 발견한 기자들이 깜짝 놀라 몰려들었다. 그러자 대통령이 말했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함께하고 있을 뿐이니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2.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고, 이어서 동구권이 붕괴되다시피 하였을 때, 프랑스에 불법 이민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왔다. 그 당시 우파 단체들이 들고일어나 불법 이민자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쫓아내야 한다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그때 미테랑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듯 말했다. "우리는 일단 우리 영토에 발을 딛고 있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고 그들의 삶의 질을 조금이라도 높여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3. 미테랑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그의 최대의 정적이었던 자크 시라크는 특별담화문까지 발표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미테랑 대통령 재임 시 사사건건 미테랑의 정책에 반대하고 비판했던 시라크는 담화문에서 "그는 한 사람의 대가였고, 의지의 인물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존중을 담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인간적인 삶을 살았다."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고인에 대한 깊은 경의를 표했다. 이를 지켜본 프랑스 국민은 많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미테랑의 공과와 한국과의 관계
전후 오랫동안 프랑스 사회당(제2대 당 의장, 재임 1971년~1981년)과 범진보 주의 진영을 이끈 지도자이자, 아직도 자당 소속으로는 유일한 프랑스 대통령이다. 외교적으로는 헬무트 슈미트와 헬무트 콜 독일 총리들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통해 양국 간 화해와 번영, 그리고 유럽통합의 초석을 닦았다.
냉전 시기 자본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나,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참가나 자유 무역 협정(FTA) 비준의 거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웃 나라인 영국과 서독보다 자주적이었다.
사형제도를 1982년 없애는 등의 인권을 강조하는 입법과 자주적인 대미 관계와는 달리 약소국가와의 외교관계에서는 고자세를 보였고, 1985년에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핵실험을 감시하는 그린피스 소속 레인보우 워리어 호를 격추시킨 일과 1995년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당시 약속한 테제베를 구매하는 조건으로 병인양요 당시 약탈한 한국의 서적을 반환하는 것을 거부해서 국제사회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93년 9월 14일 ~ 16일까지 프랑스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한-불 정상 회담을 하고,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 측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단, 그 구체적인 시기와 절차는 실무협의하기로 했으며 그 결정의 상징으로 《휘경원 원소도감 의궤》 상 1권을 9월 15일 한국에 반환하였다.
'정치는 언제나 차선이 아닌 차악의 선택'이라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이 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을 뽑아 정치를 맡기는 것이 아닌 그중에서 그나마 난 사람을 선택하기도 갈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국가를 사랑해라, 아니면 떠나라.”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사랑해라.’라는 말은 국가에 충성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버리는 것에 연연해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국가 정체성을 위해 이민자들의 정체성은 가볍게 여기고, 강력한 국가를 위해 힘없는 개인을 소외시키고, 국격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기업만을 키우고 노동자는 탄압하는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국가중심의 개발성장 논리가 극을 달리게 되면 '이 모든 것이 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니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네가 떠나면 된다.'라는 식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기업의 CEO는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사실 사람인 노동자보다 기업의 ‘이윤’이 더 우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가의 대통령은 기업처럼 이윤을 내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 되어선 곤란하다. 대통령은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기치로 사적 이익을 축적하지 않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 국가의 국격을 높이는 어려운 자리이다. 상황을 적당히 보아가며 여론에 대충 맞춰서 현 정부에 적당히 반대하고 적당히 묻어가며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는 사이비 정치인은 앞으로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서민의 삶을 이해하고 국가가 지향해야 할 목표와 가치를 파악하는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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