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3. 15:30ㆍ☆- 문학과 창작 -☆/소설이 걷다
역시나 누나는 소박한 심성을 가진 착한 소녀였다. 누나는 나랑 철길과 백사장 주변에서 놀던 기억들이 이제는 삶을 지탱해주는 그녀의 마지막 보루이듯, 어쩌면 이승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에도 기억의 편린 속에서 끄집어낸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누나의 손을 꼭 잡고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 누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누나의 손은 불처럼 뜨거웠다. 마치 자신의 작은 몸을 하나도 남김없이 활활 태워버릴 듯이. 누나는 한참이나 나의 이름을 부르다가도 때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갔다. 병원도 가지 못하고,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무심하게 그렇게 갔다. 가엾은 누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강가에서 놀던 기억을 안고서 나의 이름을 부르다가 결국 저세상으로 갔다. 누나는 어쩌면 생의 질긴 인연을 스스로 끊지 못하고 아파하다가 속으로는 나를 원망하면서, 때로는 나를 그리다, 이 세상을 하직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누나는 나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백사장에 함께 나가지 않았다면 누나가 죽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면 조금이라도 일찍 누나와 집으로 돌아왔더라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커다란 회한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퀴퀴한 냄새가 허공을 떠도는, 어딘가 짓눌리고 어두컴컴한 분위기의 화장터에서 누나는, 자신의 몸이 불태워져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 몸서리쳐지도록 음침한 그곳에선 두렵고 음산한 기운이 내 어깨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누나는 거적에 둘둘 말린 채 아버지가 끄는 손수레에 실려서, 어머니와 나의 눈물을 안고 이곳에 왔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에 누나는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평소 소원했던 핑크빛 화려한 드레스는 걸쳐보지 못하고 단지 한 장의 거적에 마지막 육신을 의탁했고, 누이를 조문하는 국화꽃 향도 느껴보지 못한 채 다만 울음 짓는 동생의 기억만 아련히, 그렇게 우리 곁을 훌쩍 떠났다.
팔월의 어느 뜨거운 날에.
처마 옆으로 길게 세워진 양철 수로 통 위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여 창 밖을 내다보았다. 잿빛 하늘 위에서는 무수히도 많은 물방울이 지면으로 사정없이 떨어진다. 누군가 바깥마당에 내놓은 행운 목의 이파리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텃밭 가장자리에 심어놓은 연두색 상추의 넓은 잎에도 빗물은 여지없이 흐르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내리는 밤 비를 바라보며 나 홀로 이 밤을 지새우고 있다. 이제는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만 빗줄기만이 창가를 연방 두드린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누군가가 지나간 일은 가슴 속에 깊이 담아두지 말라 했거늘, 오늘 밤은 어쩐지 긴 상념의 꼬리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헤집고 지나간다. 비 내리는 이 밤에 불어오는 소소한 찬 바람만이 스산한 외로움을 안기며 어렴풋이 떠오르는 추억의 한 장면을 더한다.
고등학교 일 학년 무렵이다. 바로 뒤에 앉은 영철이란 녀석은 항상 자신의 여자 친구를 나에게 자랑하였다. 충청도 부여에서 올라온 서울 유학생인 녀석은 생긴 것과는 달리 무척 순진했다. 당시 인기있던, 일본의 레슬링 선수인 ‘이노끼’를 닮아서 얼굴은 언뜻 보기에 무척 강인해 보였지만 성격은 무척 서글서글하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우호적이었다. 그가 항상 이야기해 주던 자신의 여자 친구는 나로 하여금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였다. 나중에는 오히려 내가 참지 못하고 영철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물어보게 되었다. 후일 들은 이야기지만 둘은 별로 애틋한 사이도 아닌 단지 녀석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번이었던 나는, 모두 나간 체육 시간에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새삼 그녀가 생각나면서 그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녀석의 수첩 속에 있던 여자 친구의 전화번호를 훔쳤다. 다만 그녀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전화번호를 알아냈어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 엄두는 내지 못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그저 오로지 마음속의 생각으로만 그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에 대한 갈망이 깊어만 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신체적으로만 변화가 따르고 아직도 미숙한 정신세계는 신체적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이라, 단지 겪어보지 못한 이성에 대한 관심만이 온통 집중되었다. 당시 내가 활동하던 클럽의 모임에서 우리 일 학년들만 미팅을 하기로 했다. 주선자는 길만이 녀석으로, 녀석은 우리 모임의 반장이다. 그림을 잘 그렸던 녀석은 입담이 대단했다. 평소에도 자신이 오 분만 이야기하면 어떤 여자애라도 금방 친구로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던 녀석의 꼬임에 넘어가 영철의 여자 친구 전화번호를 넘겨주고 말았다. 결국, 그렇게 녀석의 공언대로 미팅은 성사되었다. 우리들의 첫 미팅은 몇 번의 변경과 취소 끝에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던 토요일의 어느 날에 경복궁에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한 번도 접촉해보지 못했던 여학생들과의 만남이라 무척 떨렸다. 소심했던 나는 기다렸던 미팅임에도 여학생들과 제대로 시선을 맞추지도 못하였고, 다만 근정전 호숫가에 피어 있던, 연꽃 잎에 초롱초롱 맺혀 있는 물방울만을 바라보며 가끔 나에게 던지는 여학생들의 물음에 어설프게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영철의 여자 친구인 미화는, 과연 내가 그리던 여인이었다. 전체적으로 동그란 얼굴을 하고 짙은 눈썹을 가졌으며 그 아래로 적당히 높은 콧대에 작고 도톰한 입술을 하고 있었다. 가끔 힐끔힐끔 돌아보면 미화의 옆 모습이 예쁘게 들어왔다. 마치 누군가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 순간 이제는 오랜 기억 속에서 잊혔던 누나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무덥기만 하던 더위 끝에 기나긴 장마가 시작되던 어느 여름날. 그날도 온종일 오락가락하던 비가 잠깐 멈춘 시간. 나는 하릴없이 덕수궁 정문 앞에서 미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지나가는 많은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의 행렬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만남과 이별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싸늘한 한기에 젖은 여느 대합실 광경을 떠오르게 하였다. 어느덧 30여 분 정도를 기다리다가 기다림에 지쳐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버스 정류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틈에서 미화가 조용히 걸어왔다. 예쁜 병아리 색깔의 노란 우산을 쓰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미화를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용기를 내었는지 나는 먼저 미화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미화에게 한 번 만나줄 수 있는지 물었었다. 뜻밖에 미화는 반갑게 응했다. 미화와의 만남을 가슴 저리며 기다리던 나는, 이상하게도 오래전에 죽은 누나의 꿈을 매일 밤 꾸었다. 어느새 내 앞에 서서 환하게 미소를 짓는 미화의 모습이 여전히 싱그럽기만 하였다. 우리는 덕수궁 안에 있는 석조전 돌기둥에 기대서서, 막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떨어지는 빗줄기 아래로 미화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고 그 위로 겹쳐져 아련한 누나의 얼굴도 떠올랐다. 아직 기른 지 얼마 안 되어서 짧게 뒤로 묶은 미화의 양 갈래 머리 위로는 빗방울이 튀고, 무심한 표정으로 비가 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미화의 옆 모습에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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