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2. 10. 18. 11:00♧- 사는 이야기 -♧/역사와 예술

 

 

 

 

 

 

 

 

 

 

역사는 지나간 과거를 문자로 남긴 것이다. 그 역사는 수천 년을 살아남아 지금 우리와 만나고 있다. 역사는 과거를 교훈 삼아 현재를 제대로 살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자는 선조들의 피나는 노력이 담겨 있다. 역사는 그렇게 땀과 눈물과 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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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 (註: 카톨릭에서는 하나님을 하느님이라 지칭)

 

1095년 11월 27일 로마의 주교이자 교황인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설교도중 이렇게 외친다.

 

"동방 교회의 형제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슬람교도와 아랍인들에게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상스러운 종족들을 그 땅에서 영원히 몰아냅시다!"

 

도움을 청한 이는 비잔틴 제국의 왕자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다. 우르바누스 2세의 외침을 들은 청중 하나가 큰 소리로 화답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1,000년에 걸쳐 일어나게 될 전쟁의 막이 오른 순간이다.

 

중세 사람들은 성지순레를 다녀오면 죄를 일부 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구원에 한 발 더 다가가기 위해 사람들은 길고 긴 고행길을 선뜻 나섰다. 순례길의 여러 성지 가운데 최고는 당연히 예루살렘이었다.

 

11세기 후반 셀주크 투르크가 세력을 넓히면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점령했다. 투르크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독교들에게 통행세를 무리하게 걷으면서 갈등이 일어났다.

 

십자군 원정의 1차 목표는 예루살렘 수복이었다. 교황은 십자군을 이렇게 독려했다.

 

"내 명령을 따르는 것은 주님의 명을 받드는 것이니 나를 따르면 너희의 모든 벌과 죄를 사면해 주리라."

 

면벌부 또는 면죄부라는 말이 등장한 게 이때다.

 

그러나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목적 아래 치러진 이 전쟁에서 십자군은 상스럽고 끔직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이슬람 사람들을 산 채로 태워죽이고 닥치는대로 찔러 죽였으며 갓 태어난 아기들을 벽에 던져 죽였다. 한 십자군은 고향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솔로몬 궁의 회랑과 성전에서 우리 군대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말의 무릎까지 사라센 사람들의 피로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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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성스러운 전쟁'

 

우르바누스 2세의 목적은 단순한 성지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복잡하게 얽힌 세력관계를 정리하고 일거에 패권을 쥐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막강한 세력을 동로마 교회에 과시함으로써 서로마 중심으로 기독교를 통합하고자 했다. 나아가 적대관계에 있던 독일 황제도 곤경에 빠뜨리고 싶었다. 당시 십자군의 지휘관을 모두 프랑스의 귀족들이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유럽 내부에서 무력을 과시하던 기사들의 호전성을 밖으로 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십자군은 1차 원정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초기 십자군의 성공은 부분적으로 이슬람 세력이 제대로 힘을 합쳐 대항할 태세를 갖추지 못한 데 힘입기도 했다. 그러나 곧 이슬람 세력이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결국 예루살렘은 채 100년이 되기 전인 1187년 이슬람 세력에게 다시 넘어갔다. 십자군은 2년 뒤인 1189년 독일, 프랑스, 잉글랜드 왕까지 가세해 3차 원정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198년 교황에 즉위한 로마 주교 인노켄티우스 3세의 촉구에 따라 4차 십자군 원정이 실행됐다.

 

그러나 이 원정에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수치스러운 사건이 벌어졌다. 1203년 7월 5일 십자군은 형제나 다름없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피로 정복했다. 무자비한 약탈과 방화, 강간이 벌어졌다. 

 

이는 기독교 세계가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회로 영원히 분리되는 결정타가 되었다. 결국 십자군은 7차 원정까지 이어졌지만 실패로 끝났다.

 

카톨릭의 다른 기독교에 대한 공격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16세기에는 카톨릭 내에서 개신교에 빼앗긴 땅을 되찾자는 움직임이 들불처럼 일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개신교 위그노파 신도 1만 명이 학살당했다. '위그노 대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카톨릭 세계는 1618년부터 30년간 개신교 세력과 전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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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석조 건축위에 세워진 프란체스코회 채플)

 

신대륙으로 향한 십자군의 칼날

 

신대륙 원정대는 사실상 겉모습을 바꾼 십자군이었다. 원정대는 신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할 때마다 먼저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를 지었다. 절대권위인 교황은 열강들의 영토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중재자로서 기독교 전파에 더 적극적인 나라에 영유권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1526년 프란체스코회 선교사 12명이 멕시코에 건너간 이래 펼쳐진 이방 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은 무척 잔혹했다. 무엇보다 카톨릭교도가 신대륙에에 퍼뜨린 구대륙의 전염병 등은 신대륙 사람들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16세기에 세계 인구가 4억 명 정도였는데 이중 8천만이 아메리카에 살았다.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이 들이닥친 후 이 인구는 1천만으로 줄었고 17세기에는 겨우 백만 명 정도만 남았다. 에스파냐 군대가 건너가면서 함께 가져간 천연두, 말라리아, 인플루엔자는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을 '대학살'로 파괴를 '절멸'로 키웠다.

 

라스 카사스라는 선교사는 "신을 믿지 않는게 기독교인으로 죽는 것보다 낫다."라며 기독교도의 만행을 반성했다. 1562년 서인도위원회에 그가 제출한 문서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정복이라 불리는 모든 전쟁은 정의롭지 않다. 우리는 부당하게 인디오의 왕국을 빼앗았다. 원주민 강제노역(엔코미엔다)은 잔인한 악이다. 이를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다. 투르크인이 기독교 공동체를 약탈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듯이 역시 인디오를 약탈해서는 안된다.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우리를 향해 정의로운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를 몰아낼 권리가 있다."

 

이런 반성의 연장선에서 20세기 신대륙에서는 해방신학이 발달했고 일부 사제는 직접 총을 든 신부가 되어 무장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부시 정권의 대외정책 수립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네오콘(neocon, 신보수주의자)이 주도했다. 네오콘 가운데 일부 이론가들은 실제로 이 전쟁을 유대-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대결이라고 규정하며 20세기판 십자군 전쟁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이제 미국은 자신들의 압도적 무력으로 쉽사리 점령했던 이라크로부터 철수했다. 어쩌면 1,000년 전 십자군과 이리도 비슷한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촉발한 성전은 그 성스러운 임무를 아직 다 마치지 않은듯 1,000년 넘게 모습을 바꾸어가며 계속되고 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열어젓힌 1,000년 전쟁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음원제공 YouTube : The Saddest Thing _ Melanie Safk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