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는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마지막회]

2012. 10. 13. 18:00☆- 문학과 창작 -☆/소설이 걷다

 

“야! 이 병장.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정 하사는 근무 복장에 총까지 휴대하고 있었다. 막 근무를 끝내고 돌아오던 길인지, 아니면 근무를 나가려고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왜요?”

나의 대답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와.”

“여기서 이야기해요.”

“쓰발. 따라오라면 따라와.”

정 하사는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비상진지 벙커로 나를 데려갔다.

“요새 너희 병 고참이라는 자식들은 완전 개판이야.”

“본론만 이야기해요.”

정 하사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의 태도를 보고 정 하사는 더욱 열을 받았다.

“그래. 너희가 우릴 갈구리라고 따돌리고, 밑에 있는 아이들을 교육해서 우리에게 경례도 못하게 하는 것 다 알고 있어. 인마.”

“그래서 어쩌라고요?”

그 당시 부대 내에는 분대장들과 병들의 알력이 많았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같이 훈련받고, 함께 근무를 서고, 또한 같은 내무반에서 함께 뒹굴던 처지에 비록 선임과 후임의 신분 차이는 있을지라도 또 다른 벽은 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한 그날 아침에 나는 다만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뭐? 이 자식 말하는 것 봐라.”

“쫄다구를 아무 이유없이 두들겨 패고선 하는 싸가지라곤…”

“뭐! 싸가지?”

나는 정 하사를 한 대 칠 듯이 노려보았다. 그는 사실 나보다 입대 날짜가 두 달이나 빠른 선임이었다.

“어쭈. 잘하면 한 대 치겠다.”

“요새 군대가 아무리 개판이라도 더는 눈꼴이 시어서 봐줄 수가 없네.”

정 하사는 갑작스레 M 16에 장전을 하더니 총구를, 나를 향해 겨누었다.

“무슨 짓이야! 총을 어서 내려놔.”

“왜? 이제 겁나니? 어때? 내가 못 쏠 것 같지?”

정 하사의 돌출 행동에 위협을 느꼈다. 내가 막 정 하사의 총을 빼앗으려는 순간, 비켜 올라간 정 하사의 총구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적막한 고지 위에서 단말마의 비명처럼 울린 총소리는 생각보다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산중의 정적을 깨뜨렸다. 모두 총소리를 듣고 놀라서 우리에게 달려올 때까지, 우리는 둘 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헌병대의 조사를 받고서 보급품을 챙기고, 더플백과 군장을 꾸린 다음 예비대대로 내려가야만 하였다. 2주 동안 연대의 군기교육대 입소를 명받았다. 따라오는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대대로 가는 트럭 위에서, 흔들리며 바라보는 늦가을의 풍경은 허전함으로 자리하였다. 이미 추수도 끝나 버린 쓸쓸한 들녘 위로 옹기종기 쌓아 놓은 짚단 더미가 때론 뒹굴고, 골과 골 사이 능선을 따라 구축한 진지가 성곽처럼 띠를 이루며, 이미 헐벗은 나무들의 발아래에는 낙엽만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정 하사는 사단 영창으로 이송되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헌병대 지프에 오르던 정 하사의 퀭한 눈길 아래, 벌겋게 부어오른 눈두덩이 안쓰러움을 더했다.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어려운 환경에 처하더라도 죽지 않고 살다 보면 아마도 적응이 될 것이다. 급작스럽게 쓰지 않던 근육을 무리하게 움직이다 보면 탈이 나서 마비가 오기도 하고 통증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근육을 쓰면 근육은 적응하게 되고 나아가 새롭고 튼튼한 근육을 그 부위에 더한다.

유격 훈련을 받던 기억이 떠오른다. 모두 싫어하는 유격 훈련을 받으러 가면 처음에 조교들이 PT 체조를 시킨다. 팔굽혀펴기 200회 실시! 몇 회? 200회. 복창 소리가 불량하다. 다시 400회 실시! 이번에는 쪼그려뛰기를 한다. 300회! 몇 회? 300회. 복창 소리 봐라! 500회 실시! 아무리 긴장하고 준비된 자세로 임하더라도, 일단 조교가 부르는 황당한 횟수에는 모두 기가 질려 버린다. 그러나 비록 힘든 훈련이지만, 그래도 모두 낙오 없이 훈련을 마친다.

때로는 강한 자들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찌 보면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바로 강한 것이 아닐까?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꿋꿋이 살아남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한순간 좌절감도 들고 회의에 빠질 수도 있다. 살다 보면 굴욕과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는 날도 무수히 많으리라. 그래도 살아야겠다. 괴로운 하루가 밤을 지나 기약없는 내일로 이어지더라도, 언젠가는 이 악순환의 고리가 끝을 맺고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달려가는 이 길이 끝나면 그곳엔 해가 지고, 또 어둠도 내리리라. 그래도 새벽은 다시 열릴 것이다.

 

아버지. 국수 사왔어요.”

갑자기 집 안의 시간이 정지한 듯 적막하기만 하다. 집 안은 아무도 없고 마치 나를 허허벌판에 동이 그렇게 쓸쓸하였다. 그동안 태어나서 살아왔던 이곳이 지금은 왠지 낯설기만 하였다. 바로 전에 국수 심부름을 떠났던 집은 이제 나를 반겨주는 그런 곳이 아닌 것만 같다. 댓돌 위에 어지럽게 나뒹구는 신발들이, 어린 나의 의식을 헤집고 들어와 혼란과 서글픔만을 안겨 준다. 항상 정돈되고 가지런한 신발들의 정렬은 순조로운 생의 흐름을 엮어나가다 지금은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서럽고,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 갇혀 버렸다.

~

누워계시던 아버지는 내가 들어오던 소리에 몸을 일으키시다 그만, 무더기의 뻘건 피를 밖으로 토해내시고 말았다. 그래도 힘겹게 일어나시던 아버지는 커다란 고목이 쓰러지듯이, 방문 앞으로 힘없이 쓰러지셨다. 마치 눈앞으로 컷의 슬로우 액션이 흘러가는 듯 보였다. 어린 나에게는 도저히 믿을 없는, 편의 슬픈 장면이 그렇게 펼쳐졌다. 나를 쳐다보시던 아버지의 슬픈 눈빛. 아마도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시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때 대문 밖에서 형이 들어섰다. 뒤이어 들리는 형의 울부짖음. 머릿속이 휑하니 빈 듯하다. 나는 대문 밖으로 나와 멍하니 주저앉았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엄마가 쪽진 머리를 풀고서는 댓돌 위로 무너지시며 울음 짖는다.

아이고. 아이고.

나는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국수는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에 놀라 대문 안을 기웃거리던 동네 조무래기가 대문 계단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보고 의아스럽게 물었다.

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울지도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