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3. 17:30ㆍ☆- 문학과 창작 -☆/소설이 걷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 날 밤이었다. 퇴근 무렵부터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장대비를 이루었고 하늘은 금세 어두워졌다. 빗 길에 집까지 먼 거리를 운전하기가 퍽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라도 타고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차 없이 퇴근했다간 다음 날 아침에 약간 귀찮으리란 생각을 하곤 힘들어도 차를 몰고 가기로 했다. 하지만, 곧 후회하였다.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도로 사정마저 여의치않아 운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가끔 지나가는 차들도 저속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항상 이용하던 국도는 내리는 비로 도로 사정이 엉망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괜스레 답답하던 중에 마침 차도 없는 한적한 길로 들어서자 속도를 높였다. 그러다 전방에 커다란 물구덩이가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피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크게 잘못된 판단이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 도로는 타이어와의 마찰 면에 수막이 생기면서 급브레이크를 밟자마자 나의 차는 마치 허공에 뜬 연이 바람에 휘둘리는 모양으로,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사정없이 돌기 시작했다. 어찌해 볼 수도 없이 도는 차 안에서 단지 커다란 공포감만을 맛보며 떨고 있었다. 몇 바퀴나 돌았는지, 나의 차는 이리저리 흔들리다 겨우 길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는 가드레일을 들이박곤 멈추어 섰다. 언제부터인지 뒤쪽에서 나의 차를 따르던 커다란 트럭이 도는 나의 차를 경적을 울리면서 간신히 비켜 갔다. 참으로 짧은 순간에 주마등처럼, 옛날 어린 나이에 죽은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아버지의 수레를 밀며 화장터로 가던 기억도 섬광처럼 머리를 강타한다. 가는 도중 내내 울음 짓던 나의 모습이 이어진다. 묵묵히 수레를 끌던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는 순간, 허망하게도 드러난 아버지의 얼굴은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거친 자신의 손을 올려 가렸던 가면을 벗어 보이자 우습게도 미화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마도 내가 잠시 정신을 잃었나 보다.
불침번 교대를 위해서 강 일병을 깨우고선 막 침상에 앉아 군화 끈을 풀려고 하던 차에, 내무반 문이 갑자기 열리며 운전병인 박 병장이 들어섰다. 박 병장은 다소 서두르며 나에게 소리쳤다.
“야, 이 병장! 깨어 있었구나. 마침 잘 됐다. 빨리 군장 차리고 나와라.”
“왜? 난 이미 근무 끝났는데.”
“야, 빨리 나와. 중대장이 지금 통문에 가야 하는데 경계병을 데려오래.”
“아! 제기랄. 기상 시간이 1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나도 좀 자야지… ”
“중대장이 60 사수 데려오란다. 빨리 가자. 그리고 너! 이 병장. 아직 통문에 안 가봤잖아.”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통문이라는 말에 솔깃해 따라나섰다. 막사 앞에 정차된 지프는 이미 시동이 걸려 있었고, 중대장도 벌써 선탑해 있었다.
“단~결!”
“단결. 어서 타라. 60은 빨리 거치하고. 박 병장 출발하자.”
나는 M 60을 지프 뒤에 있는 거치대에 재빨리 거치하였다. 박 병장은 아직 어둠이 깔린 산길을 기세 좋게도 달려나갔다. 나는 새벽의 찬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치대에 몸을 기대서서,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지탱하려 M 60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얼마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였을까. 갑자기 45도 우측으로 대낮같이 밝은 불빛들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불빛들 사이로 조그만 다리가 보이고, 그 앞엔 철책이 길게 놓여 있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가 오징어를 잡으려고 밤 바다에 불을 환하게 밝혀둔 듯하였다. 다리 아래쪽 강물 위로는 가물치가 뛰는 하얀 포말들이 수 없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거대한 불야성이 적막하고 어두운 고지 위에 산성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지프는 속력을 줄이면서 활주로에 막 착륙하는 비행기처럼 통문 앞에 미끄러지듯 다다랐다. 이미 통문 앞에는 통문초소 소대장이 근무병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단결!”
씩씩하게 경례를 부치는 소대장의 얼굴에 약간 긴장감이 흘렀다.
“단결.”
“수색대는 나와 있나? ”
“네. 그렇습니다. 05시 30분 정각에 통문 앞에 도착해서 지금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래?”
처음 보는 통문 앞의 밝은 불빛과, 통문 너머로 아직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앞에 보이는 곳이 D.M.Z.라는 사실에 약간 위축이 되었다. 나는 엉거주춤 중대장 뒤를 따르다 거대한 통문이 열리면서 통문 뒤쪽에 두 줄로 도열해 앉아있는 무리를 보곤 깜짝 놀랐다. 미처 어둠 속이라 채 발견하지 못했던 무리는, 얼굴에 위장하여 까만 얼굴들이 불빛에 번들거렸다. 통문이 완전히 열리자 무리가 일어나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일단의 무리는 사단 수색대로서, 지난밤에 D.M.Z. 안에서 노박을 하며 매복 활동을 하다 나온 것이다.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수색대원들의 충혈된 눈망울을 지나 아직 열려 있는 통문 너머로는 어두운 새벽 들녘이 새로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식기 조 조장인 문 상병을 몇 대 때렸다. 통문을 다녀오느라 아침 배식을 받지 못한 나는 내무반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식기 위에 불어 터진 국수를 보았다. 오늘 아침에는 라면이 나왔다는데 취사반에서 인원수를 잘못 계산해 아침 배식이 모자랐단다. 그래서 배식받지 못한 인원을 위해서 임시로 국수를 삶아 추가로 배식했는데, 문 상병이 선임인 나를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불어 터진 국수를 보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여태까지 국수를 먹지 않고 있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국수는, 너나없이 가난하던 시절에 요긴한 식사 대용이면서도 썩 훌륭한 음식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국수를 드셨고 나는 덕분에 국수 심부름을 매번 하였다. 하지만, 내가 따르고 좋아하던 누나가 변변하게 병원 치료도 한 번 받아 보지 못하고 죽자,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가슴 속에 심어졌고 또한 은연중에 그 원망이 국수에 녹아 있었다. 국수는 아버지이고 아버지는 국수와 같다. 국수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녹아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거부하는 차원에서, 무의식적이지만 국수를 먹지 않은 듯하다. 아무 잘못도 없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문 상병을 뒤로하고 내무반 문을 박차고 나왔다. 나와서 담배 한 개비를 막 피워 물려고 하는 참에 분대장인 정 하사가 뒤따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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