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베레모와 백구두와의 대화

2012. 10. 13. 18:30☆- 문학과 창작 -☆/소설이 걷다

 

어느 두 어리숙한 사내가 타운 내 모처에서 만났다. 검은 베레모를 눌러 쓴 사내는 마르고 키가 훌쩍 컸고 광낸 백구두를 신은 사내는 펑퍼짐한 몸매에 머리카락 두 올이 벗겨진 이마를 가리느라 마침 살랑거리는 바람에 서로 부둥켜안고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How are you?" 백구두가 반갑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Fine, Thank you. How are you?" 검은 베레모가 어색한 웃음을 날리며 백구두에 화답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시큰둥하다.

 

"자넨 아직도 so-so를 모르나? 언제까지 그렇게 고지식한 영국 계집아이처럼 굴 거야?" 백구두의 빠진 어금니에 박아넣은 금 브릿지가 쏟아지는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음... 당신도 읽었구먼. 요새 사랑의 역사가 대세군. 허허." 검은 베레모가 약간 놀랍다는 듯이 백구두를 바라보았다. "그럼. 요새 교양인으로 처세하려면 사랑의 역사쯤은 읽어줘야지. 자네도 읽었나?" 백구두가 살짝 김이 샌 듯 검은 베레모의 전면에 달린 독수리 휘장을 슬쩍 흘겨보다 눈길을 돌렸다.

 

"자네 말이야.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고 했지?" 백구두가 새삼 생각났다는 듯 물어왔다. "맞아. 그랬지. 베트남전에서 굉장했어." 검은 베레모는 우쭐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때려잡은 베트콩만 해도 수백 명이야." "그래서 나중에 베트콩에게 사과했나?" 백구두가 검은 베레모의 말이 끝나자마자 맞대꾸했다. 검은 베레모는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야? 하는 표정으로 백구두를 쳐다보았다. "내 말은 자네가 죽인 베트콩들도 가족이 있었을 것 아닌가. 통일된 베트남에서 자네가 죽였던 베트콩들의 가족에게 이제라도 자네가 사과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야." "내가 왜?" 검은 베레모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의 잘못된 행동으로 사람이 죽었으니 가족에게라도 위로를 해야 도리가 아닌가?" 백구두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나는 전쟁터에서 다만 전쟁을 했을 뿐이야." 검은 베레모의 눈꼬리가 백구두에 대한 분노로 가볍게 떨렸다.   

 

 

"그런데 분더킨트(wunderkind)가 무슨 뜻이야? 그 왜... 누구지? 작자 말이야." 백구두는 검은 베레모의 성난 눈길을 피해 말을 살짝 돌리며 책의 저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듯 우물거렸다. "니콜 크라우스(Nicole Krauss) 말이지? 아마 분더킨트는 문학 신동이란 뜻일 거야." "아! 문학 신동. 문학 신동이라..." 백구두는 그 단어을 머리에 입력하느라 입속으로 두어 번 중얼거렸다.

 

"그런데 책 속에 이사크 바벨의 죽음이라는 글. 자네도 기억하지? 뭐,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썩 어감이 좋지는 않네만." 백구두가 갑자기 찢어진 두 눈을 빛내며 검은 베레모를 다시 바라본다.

 

사람들이 침묵의 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 후에야 바벨은 침묵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깨달았다. 음악을 들을 때 그는 더 이상 음표를 듣지 않고 그 사이의 침묵을 들었다. (중략) 총들이 그의 가슴을 겨냥할 때 침묵의 풍요로움이 실은 말하지 않은 빈곤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침묵이 무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총에서 총탄이 터져 나올 때 그의 몸은 온통 진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의 일부는 통렬히 웃었다. 늘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침묵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백구두가 책 내용을 줄줄 외우고 있어서 검은 베레모는 새삼 그의 기억력에 놀랐다. 그러나 단지 그뿐 이었다. 백구두는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모른 채 그냥 앵무새처럼 외우고만 있는 것이다. 침묵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단어가 들어가 있으니 멋있어 보여 외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검은 베레모는 진정한 참뜻을 이해했을까? 작가는 무슨 의도로 그런 글을 썼을까. 거대한 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버린 인간의 가벼운 죽음 앞에서 진실을 밝히고 싶은 욕구로 자신을 바라보며 죽음을 애도하는 송가라고 해야 하나.

 

그때 갑작스러운 한 여성의 등장으로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그들 앞으로 한 금발의 여성이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무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그녀가 입고 있던 윗옷을 훌러덩 벗어 보이며 아무 차림도 없는 그녀의 상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인 그녀의 행동에 그들은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며 총총히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백구두의 입에서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Oh My God! 요새 타운이 왜 이 모양이야."  

 


 

  

(음원제공 YouTube : 늪 - 조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