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9. 14:00ㆍ♧- 사는 이야기 -♧/삶을 말하다
프시케님이 언뜻 플룻을 말씀해 주시니 아련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새내기 생활에도 어느덧 적응을 해나가던 무렵 지금과 같이 화창한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라일락의 푸른 향기가 교정을 뒤덮고 잎보다 먼저 피어난 백목련의 청초한 모습은 가슴을 설레게 하다 꽃은 다만 눈이 시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학교에 음대 교생들이 왔다.
우리 반에도 세분의 교생들이 배치되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예쁜 선생님께서 교실로 들어서자 우리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뒤따라 들어선 담임 선생님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면서도 교탁을 두드리며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지금 한국에 미인의 대명사로 김태희가 있지만, 당시 선생님은 김태희의 뺨을 열두 번 치고도 남을 미모였다. 우리 학교는 전통적으로 5월 말에 교내 합창 대회를 열고 있었다. 교생들은 각반에서 교생 실습도 하면서 학생들에게 합창 대회 연습을 헌신적으로 지도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음악실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오며 나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홀린 듯 끌려갔다. 그곳에서는 선생님께서 마치 기다란 반짝반짝 은빛 나는 은갈치처럼 생긴 플룻으로 비제의 아르르의 여인을 연습하고 계셨다. 물론 그때에는 그 곡을 잘 몰랐었지만.
선생님의 고운 입술로 부시는 플룻에서 새어나오는 바람은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고 천상의 소리가 되어 공중에서 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감히 눈을 떼지 못하고 선생님의 붉은 입술과 하얀 손등과 살짝 감은 눈가의 긴 속눈썹을 보았다. 마~악 사춘기로 접어든 나의 가슴은 연신 쿵덕거리고 뛰기 시작했다.
엘리스님도 일전에 지적해 주셨지만 나는 진짜 너무 부끄럼을 많이 타나 보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특히 이성에게 취약하다. 선생님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금방 친해지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선생님께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나는 얼굴만 빨개지고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두근거리며 뛰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선생님께서 수업을 마치고 나를 불렀다. 집에 같이 가자고 하신다. 사실 우리 집이나 선생님 집으로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으니 같이 가자고 하시는 내용이었다. 그때 내가 사는 집은 원효로였다. 보문동에서 살다가 원효로로 이사를 간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학교는 종암동에 있었으니 꽤 멀었다. 그렇기에 같은 방향에 사는 친구들은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께서 학적부를 우연히 보시고 같은 동네에 사는 나를 발견하신 것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런 행운이 나에게도 찾아들다니. 그 이후로 선생님께 별일이 없으면 같이 집으로 갔다. 나는 평소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그러나 묘하게도 한 번에 가는 것은 없었다. 지하철은 남영동에서 타야 하고 버스는 제기동에서 갈아타야 한다. 선생님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우리는 연인처럼 택시를 주로 이용했다. 물론 택시비는 선생님께서 냈지만.
하지만 별일(?)은 없었다. 주변머리 없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나의 성격이 어데 가겠는가. 선생님께서 물어보시는 말에나 간신히 대답하고 곧 침묵 모드로 접어드는 시간이 스스로도 답답했다. 가슴 속에는 선생님에 대한 열정이 활화산처럼 타올랐지만, 겉으로는 내색도 못하고 다만 애꿎은 내 손가락만 괴롭혔다. 애~휴 바보 같은 놈.
꿈같던 시간은 화살같이 흐르고 어느덧 우리에게도 작별의 시간이 왔다. 선생님의 헌신 속에 교내 합창대회에서 우리 반은 일등을 했다. 우리는 모두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곧 선생님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해야 했다. 선생님의 실습기간이 끝난 것이다. 나도 선생님과 아무 말 없이 헤어졌다. 선생님은 나에게로 다가와 나의 손을 잡고 나의 등을 두드리며 열심히 공부하라며 격려해 주었다. 나는 다만 눈물만을 흘리며 선생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이별의 순간은 잠깐이었지만 가슴 아픈 시간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아마도 선생님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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