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21. 17:26ㆍ♧- 사는 이야기 -♧/삶을 말하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 공식적으로 제기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별로 없다. 후안무치한 일본은 이미 끝난 일이라고 발뺌하고 있고 한국정부도 외교적 마찰 운운하며 시간만 끌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사회의 관심 속에서 외면당한 생존 할머니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만 간다. 한국 사회는 문제가 이슈화할 때만 잠깐 반짝하다가 마치 위안부 문제 자체가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인 양 비하하거나 외면하려고만 한다. 지난 2009년 위안부 박물관 건립을 '몰역사'로 몰아간 광복회의 입장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문제를 하나의 수치스러운 역사로 감추고 싶은 심리가 내재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지난 2009년 위안부 박물관 건립을 반대한 뉴스가 발표되었을 때 분노한 한 네티즌은 "김구 선생님께서 광복회에 있었다면 과연 이번 문제를 이들처럼 처리했을까요?"라고 반문한 후, "광복회란 이름이 부끄럽네, 독립운동하신 선대 분들이 무덤에서 당신들을 한없이 부끄러워하시겠습니다."라고 썼다. 이어 "독립운동하신 선대 분들이 바로 이 위안부 할머니들같이 힘없는 민초들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신 건데 그 후손이란 분들이 이분들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하고 일본 제국주의 놈들보다 더 큰 아픔을 이분들에게 안겨주는군요."라고 분노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대한민국 광복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왜 대한민국에 광복회가 존재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광복회는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를 위하여 대한민국 광복회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혹시 대한민국의 광복회엔 그와 관련된 철학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요?"라고 썼다.
배우 김여진 씨도 "독립박물관 내 위안부 박물관을 짓는 게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이라는 성명이 광복회에서 나왔고 그 때문에 취소됐다."라며 "충격에 손이 다 떨린다. 이 땅의 못나빠진 남자들에게 악쓰고 싶은 밤"이라고 광복회를 비판했다.
한편, 지난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군대위안부, 원폭 피해자 문제 등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서기보다는 뒷짐만 졌던 정부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외로운 투쟁
65명이 남았다.
현재 살아계신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의 숫자다.
종군 위안부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된 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없다. 일본은 이미 끝난 일이라고 공식 석상에서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생존 할머니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만 간다. 무심하게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만 가고 있다.
일본은 1965년 국교정상화 때 청구권 문제가 이미 법적으로 종결되었다며 우리 정부의 태평양 전쟁 때 인권을 유린당한 일본군 위안부들에 대한 배상문제를 협의하자는 제안을 공식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은 당시 논의되지 않은 사안이며, 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일본의 이런 발언이 이어진 배경에는 한국 정부의 잘못이 있다.
지난 20년간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지지부진했던 원인 중 하나로 우리 정부의 노력 부족을 꼽는다. 일본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 2조 1항’을 근거로 ‘이미 해결되었다.’라는 논리를 폈고, 한국 정부는 그에 대해 제대로 반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다만, 정부의 대책은 사과 촉구, 내부적인 경제적 지원 등에 그쳤고 위안부 문제의 핵심인 ‘청구권 문제’는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동 협정은 제3조를 통해 분쟁해결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협정 내용에 문제가 있을 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 헌법재판소도 이 3조를 근거로, 지난 8월 30일 우리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책임과 방법이 있음에도 노력하지 않았다며 ‘헌법 위반’ 결정을 내렸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두려워하여 이 문제를 소극적으로 대처하며 시대적 요청에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회복을 통한 역사적 정의 실현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국가적 과제이다. 정부는 시대적 요청에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또한,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의 위신을 다시는 추락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기념관' 건립 사업 사실상 폐기
2009년 서대문 독립공원 안 매점 부지에 위안부 박물관( 전쟁과 인권)을 건립하기 위해 터다지기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착공식만 열렸을 뿐 박물관은 건립하지 못했다.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자리할 박물관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오랜 소원이었다. 1994년 피해 할머니 등이 마련한 1500만 원의 기금과 시민의 성금 등으로 17억 원을 모았다. 박물관 건립 취지는 “우리의 자식과 손자들이 아픔을 겪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 위한 기억을 남기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동안 터 선정을 위해 관계자들은 서울시 공원 부지, 천안 독립기념관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결국, 2005년 서울시와 서대문독립공원 안 매점 부지에 박물관을 짓기로 합의했고, 도시계획실시인가도 났다.
하지만 박물관 건립은 물거품이 되었다. 애써 모은 기금도 전체 사업비 35억 원의 절반 수준에 그쳤고 정부 지원금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또한, 무엇보다 순국선열유족회와 광복회가 독립공원 안에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는 장소가 독립운동의 성지이고 선열들의 순국장소이며 독립유공자 위폐 봉안 장소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곳을 선정하여 세우려던 독립적 위안부 피해자 기념관 건립 계획도 축소 내지는 사실상 폐기되고 말았다.
노수복 할머니
그동안 태국에 살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노수복 할머니가 4일(현지시각), 향년 90세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192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21세이던 1942년 어느 가을날 부산근교 동구 밖 우물터에서 빨래하던 중 일본경찰에 강제로 끌려간 후 동남아 전선에 배치되어 약 3년간 일본군 성 노예 생활을 해야 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던 때에 또래 조선인 '위안부' 여성 한 명과 함께 말레이시아의 일본군 수용소를 도망쳐 나왔다.
할머니는 말레이시아의 잇포에서 가정부 생활을 하다가 다시 핫자이로 거처를 옮겨 조그만 태국음식점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중국계 태국인 첸 차오씨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위안부' 후유증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에 남편은 두 번째 부인을 맞아들였다.
할머니는 오랜 외국 생활로 한국말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태국에 살면서도 태국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계속 한국 국적으로 살았고 매년 비자갱신을 하면서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건강보험도, 사회보장제도의 혜택도 받지 못해 병원비도 다른 노인들보다 갑절이 더 들었다.
생일도 잊어버린 할머니가 광복절인 8월 15일을 생일로 지내왔으며, 한국어를 잊었지만, 고향 주소만은 한국어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모습이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할머니는 84년 태국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의 가족을 찾아달라고 요청한 뒤 태국 가족들과 함께 40여 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었다.
특히 할머니는 매년 광복절이면 정부 지원금으로 태국의 한국전 참전용사의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지난 8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에 참석해 ‘일본 지진피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몽당연필’에 생활비를 아껴 모은 5만 바트(한화 약 180만원)를 기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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