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죽는 남자 (3)

2012. 10. 13. 14:00☆- 문학과 창작 -☆/소설이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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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죽는 남자

 

 

어른이 읽는 동화 - 옆집 아저씨가 들려준 별 이야기 같지 않은 이야기

 

 

사내는 사스콰치 선생이 휘두르는 곡괭이 자루에 결국 머리를 강타당하고 두개골이 부서집니다. 앞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밀려드는 학생들의 물결에 옴짝달싹 못하고 고스란히 선생의 휘두르는 손길에 피할 새도 없이 당하고 말았지요. 그러나 사내는 죽지는 않았고 그 덕분에 병원 신세를 지면서 대신 그동안 팽개쳤던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그나마 대학 물이라도 먹게 되었었지요. 이야기가 감동적인 현실로 받아들여진다면 한편의 장엄한 다큐물이 되었겠지만, 처음부터 달아놓은 소제목처럼 다만 멋진 소설도 되지 못하고 어정쩡한 동화로만 기억되기를 그 사내는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이란 단어에 의외로 많은 사람이 거부감을 느끼는 듯합니다. 본능적으로 사람은 죽고 싶지 않기에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될 수 있으면 멀리하려 합니다. 심지어 예전에는 지나가는 장의 차량만 보아도 그날은 재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집착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 물질에 대한 집착, 사랑에 대한 집착, 삶에 대한 집착 등이 암묵적으로 구현되어 죽음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집착은 달리 말하면 소유욕입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실체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근저에 깔려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합니다. 죽음이란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인 양 자신을 세상에 붙박이로 묶어두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자필멸', '회자정리'를 거론하지 않아도 언제나 삶은 유한합니다. 아니 하늘 아래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잠시 망각하고 살 뿐이지요.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죽음을 희화화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염세주의가 득세한다 해도, 죽음을 맞닥뜨리는 필연적인 상황에 부딪힌다 해도 언제나 본인에게는 일생일대의 결단이 필요한 법입니다. 또한, 아무리 죽을 뻔했던 경험이 수없이 많다 하여도 죽음은 본질상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믿음이 강하고 쇠처럼 불에 달구어져 단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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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굳이 표현하자면 이별과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가족과 친구와의 이별 그리고 소유했던 물질과, 삶의 소망과, 희로애락을 느끼는 감정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치솟는 욕망과의 육체적인 단절 등으로 말입니다. 육체적인 죽음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죽음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가 논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었듯이 절망은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는 암 덩어리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절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결국 죽음에 이르지만 절망하였기에 역설적으로 희망을 품고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소망하는 것이 없다면 절망감을 느끼지도 않겠지요. 하루하루가 기다림의 연속이라면 매시간 절망합니다. 절망하는 그 순간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다시 절박한 심정으로 희망을 다지며 살아납니다. 전적으로 매달리는 커다랗고 밝은 빛을 향해 하루에도 수백 번씩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를 오르내리는 처절한 몸부림을 본인 아니면 누가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언제나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어려움이 세상에서 제일 크게 여겨지듯이 다른 이의 고통과 어려움과 죽음은 자신의 현실 문제로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가시에 찔린 자신의 손가락에 느껴지는 통증과 수만 리 밖에서 사람들이 떼죽음 당하는 사건 중에 어느 것이 중하게 여겨질지는 자명합니다. 장례식장에서의 슬픈 감정은 순간이고 배고픔과 무료함의 인내심과의 상관관계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렇기에 망자를 옆에 두고 무료함에 시작된 고스톱은 결국 싸움판이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하여 불운한 사내는 너무 불운하여 결국 남들에게 조롱과 배척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내는 자신이 불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렇기에 자신에게 닥치는 수많은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절망 가운데서도 믿는 무엇인가가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삶의 동력이 되었겠지요. 사내는 자신에게 미치는 근원적인 힘의 원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믿음이란 자신을 만드는 소중한 정신적 토양입니다. 남들이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든 자신의 믿음은 소망을 품게 하고 소망은 그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적인 가치기준의 푯대가 될 것입니다.

 

                                  

끝. 감사합니다.


 

(음원제공 YouTube : 조수미 - 기차는 8시에 떠나네)